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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검은 물 밑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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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가장 근본적인 공포는 무엇일까. 기관총을 난사하는 테러집단에 붙들린 인질범의 두려움일까, 아니면 교수대에 올라간 사형수의 마지막 순간일까.

하지만 보통사람들에게 이같은 극단적 공포는 상상의 세계에 속할 따름이다. 실제로 무서운 건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이다. 평소엔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코 흘려보내지만 돌아보면 온몸이 덜덜 떨리는 그런 공포 말이다.

부모의 부재, 사랑의 실종, 우정의 증발 등 결핍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검은 물 밑에서'는 그런 면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결핍의 비애, 밀실의 한기(寒氣)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사실 이런 공포는 필름에 담기가 꽤나 어렵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은 총과 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심장을 압박해가는 섬뜩함은 오직 감독의 손맛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원작자의 도움이 컸다. 감독은 비디오 테이프에 숨겨진 원혼을 그린 '링'으로 할리우드마저 점령했던 소설가 스즈키 고지의 단편을 영상화했다. 타인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우리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세계관도 엇비슷하다.

'검은 물 밑에서'는 밀폐된 공간의 공포를 다룬다. 손만 대도 금방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아파트가 배경이다. 한국영화 '소름'을 연상시킨다. 영화 내내 쏟아지는 폭우, 스산한 기운이 가득한 엘리베이터, 아파트 내부를 비추는 폐쇄회로 TV가 신경을 곤두세운다.

더욱 가공할 요소는 한(恨)이다. 아이 양육권을 놓고 남편과 법정 다툼 중인 이혼녀 마쓰바라(구로키 히토미)가 딸(간노 리오)을 데리고 새로 이사한 음산한 아파트에서 겪는 기묘한 사건이 축을 이룬다.

같은 아파트에서 2년 전에 실종된 여자 아이의 원혼이 이들에게 서서히 접근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절대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드라이버로 차츰차츰 조여가듯 객석을 사로잡는 수완이 탁월하다.

그 아파트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막바지 매듭이 다소 상식적이나 호러물에 능숙한 나카다 감독의 기본기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부재, 어린 딸의 절규, 타인에게 무심한 현대인의 소외 등이 정말 무섭게, 그러나 끔찍하지 않게 그려진다. 2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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