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③ 화교의 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동남아는 사실상 화교의 수중에 있다고들 한다.
인구비율이 80%이상의 압도적인 향항「싱가포르」는 말할것도없고 전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말레이지아」, 3%밖에 안되는 인니에 이르기까지 잘사는 사람은 대부분이 화교들, 경제권을 그들이 쥐고있는것을 두고하는말이다.
우리가 동남아에 상품을 수출하는데나 또 다른 분야의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는데 이들 화교가 직접간접으로 미치는 영향이 큰만큼 그들의 생리와 동태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니의 학교를 예를들어 동남아의 화교의 단면을 보면 1억1천만 인니인구 중3%에 불과한 3백만의 화교는 인니무역의 90%, 상업의 80%, 자본의 70%, 통화량의 80%를 지배하고 있다 한다.
그들이 단합하여 문닫는 날이면 인니경제가 마비된다.
화교의 본격적인 대인니 진출은 13세기경 「마조파히트」왕조시대.
그후 화상들은 주로 복건·광성에서 「자바」북부, 「스라바야」「스마랑」「자카르타」등으로 옮겨와 점포를 차렸다.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인니를 식민지 지배하던 화란은 「방카」「빌리톤」제도의 석 개발을 위해 부지런한 「쿨리」(중국인노무자)를 들여왔다.
「쿨리」들은 피땀 흘려받은 노임을 몇년이나 저축, 행상이 되고 구멍가게, 의젓한 점포를 벌이는 데까지 성공했다.
정착한 화교들은 모국에서 가족을 불러들이고 일가친척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정치적 불안이 감도는 조국보다 외국에서 남에게 의존치않고 자립하는 인생관 또는 경제관에 철저했다.
화란인들은 식민지통치에 정치성이없고, 성실·신용·근면을 자본으로하는 화교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미개지와의 물자교류, 지방관청·군·농장에의 물자수송, 토목·건축분야등에 그들을 이용했다.
기반을 잡은 화교는 화란인들이 바라는 「레이저」분야에 착안, 요리점「호텔」 영화관 사금융을 독점하는 한편 그들의 신비한 「루트」를 통해 마약밀매까지하여 치부했다.
화교의 치부는 장롱속 깊숙이 현찰로 쌓아두거나 「싱가포르」「홍콩」등지의 화교계 은행에 예금되고 산업자본화 되지않은것이 특징.
인니통화량의 80%를 쥐고있는 화교들은 물가조작을 마음대로 할수있었고 인니중앙정권을 흔들었던 인니공산당에 자금을 대기도 했다.
9·30「쿠데타」실패 후 인니가 중공과의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자 원주민의 박해를 이기지 못한 「수마트라」지방의 일부화교들은 중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중공문화혁명(66년9윌∼67년 4월)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인니 각지에서는 과거 중공의 인니내정간섭을 구실로 화상들에 대한「테러」와 약탈이 빈번하다. 인니인의 가슴속에는 검고 메마른 1억의 인니인의 주머니를 털어 비대해진 화교의 부는 인니경제를 좀먹고 있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인니의 화교들은 자본주의적 개인경제에 토대를 두고 머리는 중공을 지지하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는 것.
몇대에 걸쳐 인니에 살고있는 화교들은 언어·복장·습관등 인니화한 사람이 많다. 한가족 안에서도 국적이 인니 자유중국 중공으로 각기다른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들은 국적에따라 분산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학교들이 밀수출로 자산도피를 하는가하면 「싱가포르」「홍콩」의 화상에게서 사치품을 인니에 수입, 거액의 이익을 올리고있다.
기자와 만난 「아담·말리크」인니외상은 『3백년 이상을 이땅에 살아온 화교들의 조국은 「인도네시아」다. 조국에 헌신해야 한다. 헌신못할 사람은 중공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고 앞으로의 화교정책을 함축성있게 비쳤다. <송평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