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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첫「해후」|동·서독 월내각료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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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독과 동독의 최초의공식회담이 빠르면 이달안에 실현될것같다. 서독측에서 양독의 교역문제를 논의하기위해 동서독각료회담을 제의할것이라는 보도가나오자 동독측이 선수를써서 각료급의 통상회담을 제의하고 서독이 이를 수락한것이다.
이제 서독측에서 「키징거」수상의 정식승인만 내리면 서독경제상 「칼·실러」와 동독무역상 「흐루스트· 죌레」가 「본」이나 「베를린」서 만나게된다.
독일이 패전으로 분단된이래 처음으로 실현되는 동서독의 공식회담이 될 이역사적인 양독의 접촉이 성취되기까지는 그동안 긴준비기간이 있어왔다.
특히 66년12월 기민당과 사민당의 연립내각이 들어선 뒤로는 사민당의 서독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정책이 서독의 대동독 정책에 적잖게 반영되었다.
67년4월12일 「키징거」수상이 의회연설에서 양독협상을 제의한 것은 특기할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키징거」는 이연설을통해 ①여행제한의완화 ②전력교환,차관제공, 공동기술단구성 ③신문·잡지 연구기관의 교환등을 의제로하는 회담을 제의했다.
이에대해 동독측은 한수를 더떠서 양독관계의 정상화를 논의하도록 「키징거」를 동독으로 초청하는 공식편지를 「본」으로 보냈다.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수상시절만해도 서독이 합법정권으로 인정치않은 서동독정권의 공식 편지같은 것은 접수조차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키징거」·「브란트」정권은 「슈토프」수상의 이름으로된 이 공식편지를 일단수락하여 서독이 동독을 대하는 자세에 큰변화를 기록했다.
그때는 아무런 접촉도 실현되지못하고 하나의 선전공세로 끝났지만, 이러한 사전 움직임이 이번 각료급회담실현의 바탕이 되었다고볼수있다.
동독이 이번에 통상회담이라는 이름아래 각료급회담을 서둘러 제의한 직접동기의 하나는 「체코」의 개혁선풍과 이로인한 동구권의 동요다. 동구권내에서일어나는 개혁과 자유화에가장 위협을 느끼는 것이 동독임은 말할것도없다.
그것은 「올브리히트」정권이 가장 보수적인 「스탈린」주의로선에 운명을걸고 있기 때문이기도하지만, 더욱 절박한 이유로서는 자유화개혁을 완수하는 「체코」의 다음차례의 외교정책의 하나가 서독과외 관계개선일 것이기 때문이다.
「체코」에 대한 동구의 집단 제재가 실패한뒤 「울브리히트」가 「프라하」로 달려가 「두브체크」와 만나 특히 서독을 경계하도록 촉구한것도 그로서는 무리가아니었다. 그러나「울브 리히트」는 「프라하」방문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키징거」「브란트」정권은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와 이미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동독정권에 큰타격을 입혔다. 「울브리히트」는 이이상궁지에 몰리기전에 서독에대한 외교적인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했을것이다. 이렇게해서 나온 것이 서독에대해 외교적인 공세를 자발적으로 취해야겠다는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서독은 서독대로회담을 원할 이유가 있었다.
동서독은 그동안 무역을 계속해왔는데 서독(전체의2%)보다는 동독(전체의10%)이 동서독무역에 더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서독은 예컨대 「베를린」 통행제한같은 동독측의 정치행위를 무역이라는 경제·행위로 저지하려고 애써왔다.
그러나 66년 30억 「마르크」라는 전후최고를 기록한 양독간 무역은 67년에8·6, 68년제1·4분기에 30%가 감소하면서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이것은 동독이 입초의 현상때문에 서독에 7억 「마르크」의 빚을진 결과 양독간무역에 흥미를 잃었기때문이다. 서독은 대동독교역의 현상유지를 논의코자 회담을 바란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동독이 이번에는 그들의 존재를 승인하라는 조건을 달지않은 것이다.
이와같이 서로가 필요에 의해서,그리고 호전된 분위기 속에서 각료급 통상회담이 열리면 무역증진, 우편「서비스」료 문제로 말문이 틔어 양독간의 폭넓은 교류까지 화제가 미칠것 이다.
그러나 이회담에서 급격한 정치적인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양측의 행동반경이 너무 좁다. 다만 통일의 전망에 절망하고있는 국민들에게 미칠 심리적인 영향만은 적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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