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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2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방과 함께 진주한 미군은 이땅에 숱한 오락을 새로이 뿌려놓았다. 원래 동양인들은 지적이고 정적인 취미안에서 여가를 즐겼으나 개화와 더불어 서양의동적이며 승부에 집착하는 사행심 짙은 오락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건국당시 미군주변을 통역, 상인들을 통해「트럼프」놀이의「포카」가 성행되었고 이에 자극받아 화투놀이인「가보잡기」가 뒤따랐다. 「가보잡기」는 곧「섰다」로 이름을 바꿀만큼 6·25전후에 광적으로 퍼져나갔다. 사회불안기나 전쟁중에는 승부가 빠르고 사행심을 자극하는 놀이가 우세하기 마련. 단적인 예로 이동안 4인l조의 까다로운 마작이 3인 또는 2인까지 할 수 있도록 단순화된것이 20년 변화를 한마디로 말한다.
조남철 초단만을 공인「프로」기사로 3천명안팎의 애기가를 가졌던 바둑은 이제 최고 8단을 비롯한 49명의 전문기사와 1백만명을 넘보는 식구를 기르면서 세계의 엄지인 일본을 맹추격중이다.
건국20년동안 낚시만큼 대중속을 파고든 오락도없다. 수복후에 고개들기시작한 낚시는 20만의 애호가들이 주말마다 전국방방곡곡의 낚시터를 오색의관광「버스」로 수놓고 있다. 대로된 낚시도구가「플래스틱」화하고 떡밥등의 제조가 기업화됨에따라 고삼저등 3백리안쪽의 낚시터는 7백리바깥 운암저까지 손뻗쳤고 낚시터에 남편을앗긴「일요과부」라는 새용어까지 낳았다.
진단학회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부하는 대한산악연맹은 해방후 발족당시 수십명이 매년 기하급수로 증가되어 현재 20만회원을자랑. 서울대공대와 경북학생산악연맹의 활동을 줄기로「붐」을 일으킨 등산열은 서울근교의 백운대등을「일요명동」으로 불리게 한다. 미비한 관광시설과 군대장비에다「레저·붐」까지 편승한 등산은 폭발적인 인기속에서 1·21사태로 68년봄을 허탕 쳤다. 그러나 올바른 등산가인「산꾼」에서「니나노·띵까댕」으로 일관하는 「홍길동」식 등산가를 많이 추려내게 된셈이다.
62년「워커힐」준공으로 일본약품선전영화에서 보던 수상「스키」가 광나루에 등장하여 이제는 청평, 남이섬, 산정호수등지에서 여름철빼놓을수없는 풍경을 이룬다.
4·19직후 재일교포 재산반입형식으로 꽤 흥청거릴뻔 했던「빠찡꼬」는 사행심을 조장한다고 5·16후 된서리를 맞고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사행심에서 뒤지지않는 경마는 63년 3백60마리의 호주산「사라·브렛」등이 도입되면서부터 국가적인 오락으로 키워나가는 중.
이밖에 상류층에서 필수오락화한「골프」가 안양「컨트리·클럽」등 8개「골프」장에 4천명의회원을 확보했다. 68년여름 파도타기「서핑」과「스킨다이빙」이 해운대등지에 상륙했다. 현재 3만원쯤 드는 용구가 앞으로 5천원짜리「플래스틱」용구로 바뀔「서핑」은 2시간에 배울수 있다는점에서 급속히 번질 기세.
한편 현대사회에서 대중오락으로 가장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는 어떤가.
해방이후 처음 제작된 영화는 최인규감독의「자유만세」(1946년). 그이후 오늘까지 무려1천2백여편의 영화가 영화관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해방이후10년간 16밀리「필름」으로 제작되던 우리 영화가 1955년 이규환감독의「춘향전」을 계기로 35밀리로 바뀌고 흥행도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61년에 개봉된 신상옥감독의「성춘향」은 37만의 관객을 끌어들여 우리영화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도 외화인「벤허」의 60여만 관객에 비하면 조족지혈.
한때 고무신관객을 쫄쫄 울리던 홍루물, 국적불명의 청춘물, 살기등등한 검객물등 악순환을 거쳐 이제 우리 영화도 소위 문예영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출구를 찾고있으나 연기자의 부족, 「오리지널·시나리오」의 빈곤, 제작기재및 기술의 낙후성등 많은 문젯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영화관은 대중오락시설이 거의 없는 서민층에겐 절대적인 휴식처다. 이것은 67연도영화관 연 입장자수가 1억6천만명을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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