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사채업자에게 200만 달러 현찰 주자 수수료 15% 떼고 차명계좌로 즉시 송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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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하순,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 2094호가 채택된 지 2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초저녁. 마카오와 국경을 맞댄 광둥(廣東)성 주하이(珠海)경제특구의 새로 건설된 현대식 주하이 역사에서 김정일 초상 휘장을 검은 양복 깃에 단 젊은 북한인 3명이 나타났다. 무거워 보이는 마대 자루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30여m 앞에서 대기하던 승합차에 올라탔다.

이 차는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두 시간쯤 지나 광둥성 광저우 멍강(夢崗)구의 한 고층건물 7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한공사’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영어로는 ‘××파이낸셜’인 사채업자 사무실이다. 일행 중엔 중년의 북한인이 있었다. 그는 유창한 광둥어로 중국인 ‘러셀(Ruselle)’ 회장과 반갑게 인사한 뒤 큰 마대 자루를 내밀었다. 거기엔 현금 20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러셀은 직원에게 기계로 돈을 세게 했다. 금액이 확인되자 북한인은 봉투를 꺼내 속지를 건넸다. 돈을 송금할 계좌 번호다.

이어 영화 같은 장면이 등장했다. 러셀은 컴퓨터로 전자금융거래를 시작했다. 자신이 관리하는 차명 계좌로 잘게 쪼개 계좌 이체를 했다. 한꺼번에 큰돈이 오가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러셀이 받은 현찰은 나중에 적당한 방법으로 다른 계좌에 입금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러셀은 15%의 수수료를 챙겼다. 아주 급하거나 특수한 경우는 수수료가 30%로 올라간다.

이 사무실에 나타난 북한인들은 주하이시 샹저우(香洲)구 스화둥루(石花東路) 화징화위안(華景花園)에서 숨어서 일하는 북한 광선은행 주하이대표부 직원들과 김귀철 대표였다(※이상은 광저우의 사채시장 상황에 밝은 소식통의 말을 종합해 재구성한 것이다).

북한이 조선무역은행 산하 조선광선은행(일명 711국)의 주하이·단둥 대표부를 중심으로 연간 최대 30억 달러(약 3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돈세탁하는 등 불법 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주하이에 2005년까지 북한의 돈세탁 무대였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기능이 그대로 옮겨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중앙SUNDAY는 지난 4월 국제 금융전문가로부터 “미 재무부가 발표한 대북 금융제재 가운데 조선무역은행과 관련해 전혀 효력이 없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 뒤 국내 탈북자 중 최고의 북한 금융전문가인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김광진 선임연구원이 발표한 ‘최근 북한 금융 활동’ 분석 자료를 입수했다.

이 자료는 ‘조선무역은행 산하의 광선은행이 ▶김정은의 비자금 관리 ▶돈세탁 ▶제재 대상 은행의 송금 업무 대행 등으로 국제사회 제재를 무력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성택 당시 노동당 행정부장이 관장하는 대외보험총국 산하 싱가포르지사에서 일하다 2003년 탈북했다. 2007년엔 ‘북한의 외환관리시스템 변화 연구’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김씨는 북한의 돈세탁 수법에 대해 미 관계당국에 자문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본지는 홍콩·마카오·주하이 현지 관계자들을 취재한 결과 이런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했다. 익명을 요구한 마카오의 한 관계자는 “2005년 BDA 북한 계좌 동결 사태 이후 동남아 등으로 흩어졌던 북한의 달러화 자금이 최근 중국의 광저우·선전·주하이로 이동한 상황이 금융권에 포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의 돈세탁 방식을 ▶중국 사채업자 활용 ▶차명 계좌 이용 ▶국적 세탁 등 세 가지로 압축했다. 이에 따라 중국이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북한의 불법 금융 활동을 묵인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중국이 참여한 가운데 1718호, 1874호, 2087호, 2094호 등 잇단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해 각국에 대북 금융제재를 실시하도록 요구해 왔다. 아울러 미국은 2009년 8월 조선광선은행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주하이, 마카오, 홍콩=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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