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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醫大를 포기한 조카에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7면

조카 태엽에게. 설 연휴 때 내게 당부했던 숙제를 이 편짓글로 대신할까 한다. 그 날 너는 재수를 하면서 재도전했던 의대 진학을 포기하기까지의 어려움을 내게 털어놓았다.

또 이공계라는 차선을 선택했고, 조금은 홀가분해진 지금 좋은 인문학서 몇권을 추천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지. 너의 선택과 고민은 네 또래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겠다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글쎄다. 그날 나는 네 표정에서 어떤 미련 한 자락을 감지했다. 의사 꿈을 접은 아쉬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을 넓게 보자. 그게 공허한 주문이 아닌 것이 의학만 해도 그렇다.

내가 알기로 현재 세계의학은 질병학에서 건강학으로 성큼 바뀌고 있다. 의학의 이런 패러다임 전환을 내게 들려준 분은 며칠 전 하버드 의대로 연수를 떠난 의대 교수었다. 동료 고종관 의학기자와 함께 만났던 아주대 이종찬 교수가 그분이다.

이미 지난 4일 서울을 떠난 그에 따르면 미국 임상의학의 최고봉이 존스 홉킨스대라면, 하버드는 건강학으로서의 의학 연구의 중심이다. 한데 그들은 더 이상 서구의학을 정통(conventional)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티베트.베트남 등 문명권에 따라 여러개의 의학이 존재한다는 것, 이제 그런 성과들을 모은 종합(integrative)의학을 창출하려고 노력 중이야. 태엽아. 유감스럽게도 국내 의학은 이런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늦다고 봐야 한다.

기존 의료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나 복지.환경을 포함해 의(醫)를 바라보는 의학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근사한 교양서 한권을 추천할까? 서울대 황상익 교수 등이 집필한 '새로운 의학, 새로운 삶'(창작과 비평사)을 읽어보자.

이 책을 권하는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어. 중.고교에서 배운 '정답'이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대학에서 배울 특정 학문 패러다임 외에도 무수한 복수의 진리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태엽이가 깨쳤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 이런 말을 던진 이는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강한 이빨을 물려주고 싶다. 좁은 상상력에 길들여진 고식적 태도 대신 보다 다양한 것을 으깨 먹을 수 있는 튼튼한 이빨을…."

그렇다. 넓은 세상에서 강한 이빨을 준비하는 작업으로 슈바니츠의 '교양-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들녘)도 챙겨 읽어보자. 차제에 2천년 제도권 종교의 정당성 자체에도 의문을 품어 보자. 그걸 도와줄 읽을거리가 바로 이윤기의 신화 책들인데, 당연히 추천품목이다.

또 귀화한 러시아 학자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 역시 근현대사를 비켜선 채 바라보는 시선이 썩 훌륭하다.

내가 그날 선물했던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숭산)도 자연과학서가 이토록 쉽고, 그리고 매력 넘치게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귀한 책이다. 학교 교과서와는 천양지차이지.

태엽아, 반복하지만 세상은 정말 넓다. 그리고 그 세상 자체가 거대한 텍스트라고 나는 본다. 그것이 존재 가능한 유일한 틀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해내고 응전할까가 중요한 것이지. 다음에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남은 얘길 마저 해보자.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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