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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외국계 은행 차명계좌 10개서 자금 거래 포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해외거래가 빈번한 기업 또는 개인은 외국계 은행의 국내 지점을 이용하면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글로벌 영업망이 있어서다. 소액 거래라면 국내에 돈을 예치한 뒤 송금 과정 없이 외국계 은행의 해외점포에서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듯 빼 쓸 수도 있다. 또 장부외 거래 방식을 이용하면 합법과 불법의 영역을 넘나드는 ‘은밀한 거래’가 가능하다고 한다. 국내 은행에 비해 금융당국의 감시망도 느슨하다. CJ그룹도 이런 방식을 이용한 단서를 검찰이 잡고 수사 중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윤대진)는 외국계 금융사 C·N사 서울지점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고 31일 밝혔다. CJ그룹이 차명계좌를 개설해 자금과 주식거래를 한 정황이 포착된 곳이다. 차명계좌는 10개 안팎이다.

검찰은 2008년 이모(44) 전 재무팀장에게서 압수한 휴대용저장장치(USB)에서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현(53) 회장의 금고지기로 통하는 이씨는 당시 살인교사·배임 등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이 회장 차명재산 내역 등을 기록해 놓은 USB를 압수당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는 “차명재산이 수천억원대”라는 말 이외에 이 회장의 비자금 조성 여부 등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그러나 2009년 12월 무죄 확정 판결로 풀려난 지 3년여 만에 다시 재수사를 받게 되자 묻어놨던 비밀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최근 가족들에게 “이제는 내가 CJ를 위해 할 일은 더 없는 것 같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주변에선 “예전엔 강력한 방어막이었던 이씨가 폭탄이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 회장과 이씨의 인연이 악연으로 변한 건 왜일까. 이씨는 36세이던 2005년 이 회장의 자산을 관리하는 재무팀장에 전격 발탁됐다. 재계 관계자는 “금고지기는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며 “집안 내력이나 학력 등을 꼼꼼히 살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씨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MBA 과정 유학을 마친 뒤 2002년 CJ 재무팀에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든든한 집안 내력과 명문대 졸업의 화려한 스펙, 충성심 등을 갖춘 인재로 여겨졌다고 한다. 대구 출신인 이씨의 부친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다. 형은 미국 명문대 출신의 경제전문가이고 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이 인척이다. 이씨는 이 회장의 대학(고려대) 후배이기도 하다. 그가 이 회장의 눈에 든 결정적 계기는 CJ그룹이 일본 도쿄에 차명으로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21억 엔(약 234억원)짜리 건물을 매입하는 과정에서의 활약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임원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매입을 주장했고 매입 후 빌딩 가격이 오르면서 신임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씨가 이 회장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USB에서 발견)에서 이씨는 “한 푼의 실투자 없이 임대 수익을 내면서 도쿄 내 아카사카에 핵심 부동산을 매입했다. 빌딩을 28억 엔에 사겠다는 매입자가 나서는 등 투자 성과도 있었다”고 적었다.

 또 그는 이 회장을 ‘나랏님’ ‘조국’으로 칭했다. 편지에는 “CJ의 충성스런 시민으로 조국을 번성시키고 나랏님께서 대도를 행하심에 불편함이 없도록 분골쇄신하는 것이 인생의 신념이자 종교가 됐다”는 표현도 나온다. 이런 노력과 과정을 통해 이 회장의 최측근이 됐으나 2007년 투자금 170억원을 떼이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CJ와는 악연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이가영·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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