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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고전'으로 짚는 2003년] 5. 제3부문 시민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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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로버트 퍼트남 지음, 박영사, 2000년 출간
옥중수고(獄中手稿)/안토니오 그람시 지음/거름, 1999년 출간

시민사회는 오늘날 세계사회의 변동을 판독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근대 초기 사회계약론자들에 의해 발명된 시민사회라는 영역은 한동안 잊혀졌다가 지난 20세기 후반에 화려하게 부활한 말이다.

서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까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이 시민사회가 놓여 있었다.

시민사회 바람은 우리 경우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시민사회는 변화의 주체적 동력인 동시에 객체적 공간이었다.

시민사회를 둘러싼 일련의 토론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이론적.실천적 논쟁의 대표격이었거니와, 그와 한 쌍의 개념인 시민운동은 '제5정부' 또는 '성장 산업'이라고까지 일컬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시민사회에 관한 토론의 계보는 자못 복잡하다. 연대기적으로 보아 그것은 60년대 후반 이후 '68운동'.신사회운동.동구 사회주의의 반체제운동,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 민주화, 그리고 최근 세계화와 정보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사 변동을 이끌어온 주체다.

동시에 공간적 지평에서 시민사회는 국가에 대응하는 공간이다. 또 대내적으로 '지역적 시민사회'로, 대외적으로는 '지구적 시민사회'로 그 내용과 울타리를 동시에 확장시켜온 영역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에 대한 텍스트는 국내에도 널리, 다채롭게 소개돼 왔다. 이른바 시민사회론자에 속하는 사람들만 해도 비판 사회이론의 전통 속에 있는 하버마스, 코헨과 아라토, 그리고 아카데믹 정치이론의 전통 속에 있는 알몬드와 버바, 퍼트남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기에 시민사회론의 분류만 보더라도 자유주의적.마르크스주의적.절충주의적 시각 등 여러 흐름으로 갈라진다.

더욱이 최근 정보사회 도래와 세계화 증대로 등장한 '온라인 시민사회'와 '지구적 시민사회'에 대한 토론까지 포함한다면, 전통적인 국가학에 대비되는 새로운 시민사회학 시대가 열리고 있는 느낌이다.

시민사회가 각광받게 된 것에는 누구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기여가 중요하다. 20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사상가로 꼽히는 그람시는, 감옥에서 쓴 '옥중 수고'(원제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를 통해 죽어 있던 시민사회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시민사회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헤게모니와 시민사회로 압축된다.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지적.도덕적.정치적 지도력의 행사를 통해 창출하는 피지배 집단들의 동의를 말한다.

그리고 이 헤게모니가 형성.작용하는 영역이 다름아닌 시민사회다. 그가 강조하려는 바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가 바로 이 시민사회에 뿌리내린 다양한 제도와 실천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데 있다.

로버트 퍼트남은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원제 Making Democracy Work)로 혜성처럼 등장한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다. 토크빌적 시민사회론의 전통에 놓여 있는 그의 논리는 그람시와 사뭇 다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그리고 경제성장은 시민적 덕목의 축적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 시민적 덕목은 사람들 사이에 공동의 이익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창출하는 수많은 자발적 연결망과 결사체를 통해 배양된다.

시민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간의 미시적 협력을 기초로 형성되는 이런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연결망.규범.신뢰 등을 퍼트남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 규정한다.

이 사회적 자본이 공동의 이익을 위한 협력과 참여를 창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성숙시킨다는 것이 그의 핵심 테제다. 그람시와 퍼트남의 이런 시민사회론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그람시의 강조점이 시민사회에 내재된 지배와 피지배의 동학을 해부하는 데 놓여있다면, 퍼트남의 강조점은 시민사회에 내재된 사회자본의 중요성 부각에 맞춰져 있다.

이 점에서 두 사람이 제시하는 시민사회 전략 또한 그 타깃이 다르다. 그람시에게 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 시민사회의 일차적인 기획이라면, 퍼트남에게는 시민사회의 쇠퇴를 역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의 제도적.문화적 자원을 재활성화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다.

한걸음 물러서서 오늘날 시민사회의 현주소를 지켜볼 때 이 두 전략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손들어주긴 어렵다. 시민사회는 한편으로 사회변동의 주체로서 재등장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탈정치화와 상품화의 덫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적 대항 헤게모니를 모색하는 것과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문화를 구축하는 것은 동시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근대적 시민사회가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과 함께 빠른 속도로 변형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먼저 정보사회의 도래는 사이버 공간의 공공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시민사회'를 등장시켰다. 이 온라인 시민사회는 현실 정치와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 왔으며, 특히 네티즌이 형성하는 사이버 여론은 우리 사회의 경우 지난 대선과 촛불시위에서 큰 위력을 떨친 바 있다.

한편 지구적 시민사회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현재 지구적 시민사회는 국제적 비정부조직(NGO)과 사회운동의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해 '지구적 민주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오늘날 근대 민주주의가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시민사회가 문제시되는 것은 이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하려는 것은 모든 시민사회론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21세기 새로운 변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이 질문이 유효한한 시민사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화두의 의미를 지켜나갈 것이다.

김호기 교수(연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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