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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기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비가 너무나 오래 내리지 않습니다. 빗물만 가지고 겨우 살아가던 이 겨레에게 이 어이한 변괴오니까. 새파랗게 뻗어나던 보리이삭이 여물지도 못한 채 시들어가고 모를 기르는 논바닥에는 물기가 걷혀가니 금년 농사는 어쩌라는 거오니까.
수력전기가 맥을 놓고 수도물마저 부족해지면 가뜩이나 물조차 주리던 높은 지대의 어렵게 사는 이들은 어쩌라는 거오니까.
양수기를 준다느니, 모를 밭에다 심으라느니, 높으신 분들도 어지간히 애를 쓰는 눈치이나 그것 가지고야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인사치례 가지고는 다급해진 가뭄에서 피어날 수는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오리까.
전일에는 비가 내리지않으면 상감마마께서 끼니를 거르시고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임금 때 황희라는 정승은 자기의 덕이 부족하여 하늘이 비를 내리시지 앉는다고 사표를 냈다고 하지만, 목이 마를 때 우물을 파는 식의 응급대책은 크게 도움은 되지를 않습니다.
세금이 올라도 곧잘 물고, 물가가 뛰어도 무던히 견디는 이 마음씨 곱고, 참을성 있는 성자신손 에게 무슨 죄가 많다고 이렇듯이 심한 형벌이 닥쳐오는지 너무나 너무나 억울합니다.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옵니까.
대를 이어서 부지런히 농사짓고, 면소 지서 나리들에게 어린양같이 순종해온 그분들이어니 조상의 무덤이 있는 정든 고향을 등지고 어디가서 살길을 찾으란 말이오니까.
그분들을 살리는 길은 오직비, 비뿐이올씨다.
비를 내리소서.
비를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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