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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로 호적 세탁돼 입양 … 나 같은 비극 다신 없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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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호규씨는 “고아도 아닌데 엉뚱하게 입양을 가는 나 같은 비극이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씨는 7세 때 길을 잃어 고아원으로 가게 됐다. 이후 고아원은 돈벌이를 위해 미아인 한씨의 신원을 고아로 세탁해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지난 24일 서울 이태원동 거리에 서 있는 한씨. [최승식 기자]

지난 24일 한국은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에 가입했다. 태어난 나라에서 가장 먼저 보호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입양 과정에서 아동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절차를 규정한 국제조약이다. 이에 따르면 입양기관이 아닌 양국 정부가 직접 입양아의 입국에서부터 국적 취득까지 입양 절차 전반을 검증하고 책임진다. 왜 이런 조치가 필요할까. 이 질문에 답이 될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가 여기 있다.

2009년 11월 3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 출국장으로 몬트를 압송하던 국토안보부 직원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당신은 이제 미합중국 영토 어디에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30년의 미국 생활은 이렇게 간단하게 끝났다. 하지만 몬트에겐 너무도 복잡한 문제였다. 그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며, 친구도 없었다.

 “한국에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몬트가 그 직원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무성의했다.

 “그건 당신 나라에 가서 물어보세요.”

길 잃고 미아됐다가 고아원 돈벌이에 희생

 당신 나라라니, 기가 막혔다. 그는 30년 전 미국으로 입양돼 줄곧 미국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고. 납득할 수 없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는 명령이었다. 미국으로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선택은 없고 명령만 있었다.

 다음날, 2009년 11월 4일 인천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 몬트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몬트가 아니라 한호규(42)였다. 입양인 게스트하우스를 들락거리다 지금은 서울 이태원동에 둥지를 틀었다. 매일 레스토랑에서 오후 6시까지 일을 한다. 그가 이태원을 벗어나는 경우는 좀체 없다. 말이 통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그에게 이태원은 삶의 터전이면서 빠져나갈 수 없는 섬 같은 곳이다.

 그는 자신의 강제추방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정식으로 입양됐는데 어떻게 불법체류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일곱 살에 서울 할머니 집에서 나와 혼자 길을 헤매다 미아로 발견됐다. 한 미군이 경찰서로 보냈고, 경찰은 한 영아원으로 보냈다. 그때가 1977년 10월 24일이다. 입소 다음 날 영아원은 한 입양기관에 해외입양을 의뢰했다. 다음 달인 11월 23일 입양기관은 그의 고아호적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다음해 11월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양아버지 학대 … 가족들 신고 못하게 위협

 당시 입양제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멀쩡하게 부모가 있는 아이인데도 입양기관은 한 달 만에 고아로 만들었다. 오로지 입양을 보내기 위해서. 당시 돈벌이와 관련한 이 같은 호적세탁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실제 그의 호적은 살아 있었다. 이 덕분에 30년 만에 고국으로 쫓겨온 몬트가 25일 만에 칠순이 넘은 생모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이름 한호규도 되찾았다.

 마흔이 다 돼 돌아온 아들을 보고 노모는 오열했다. “30년간 매일 밥상에 네 밥그릇을 올렸단다.” 그는 친모가 그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친모와 보름에 한 번꼴로 통화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제대로 대화를 못 한다. 친모의 눈물을 보며 불현듯 미국인 백인 양부모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무섭고 괴롭던 기억이었다. 그는 미국 중부에서 양부모와 살았다. 양아버지는 그를 때리고 학대했다. 가족들은 그에게 “경찰에 신고하면 양아버지가 잡혀 갈 거야. 그러면 너도 끝이야”라며 겁을 주었다.

 한씨가 미국으로 입양 갔을 때 양부모에겐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양육권만 주어졌다. 아이가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선 차후 시민권 취득 절차를 따로 밟아야 했다. 그런데 입양아 양육을 중간에 포기하는 양부모는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양부모는 한씨가 18세가 될 때까지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양부모가 이혼하면서 한씨는 위탁시설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미국 시민권 취득이 안 된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시민권 신청 안 해줘 불법체류자로 살아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그는 자연스레 어둠의 길로 빠져들었다. 성인이 된 후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93부터 3년간 이라크에서 주둔했다. 걸프전이 끝난 후 이라크 재건 사업에 투입됐다. 전역 후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2001년 어느 날 그는 친구가 부탁한 화물을 배달했는데, 그 속에 마약이 들어 있었다. 마약 운송 혐의로 체포된 그는 4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이때 조사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한씨를 조사하던 이민국 직원은 “주마다 외국인보호소에는 수십 명의 한국 입양인이 불법체류자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알려줬다.

 복역을 마친 한씨는 불법체류자에 범죄 경력 낙인이 찍혀 집중관리 대상이 됐다. 출소 후에도 6개월에 한 번씩 이민국에 와서 신고를 해야 했다. 이 의무를 3년 넘게 지키던 그는 2008년 8월 이민국 신고 의무를 딱 한 번 어겼다. 한씨는 결국 강제 추방됐다.

 지난 24일 한국은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이 협약은 해외입양에 국가 간 협력 필요성이 제기돼 93년 5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회의에서 공식 채택됐다. 한국을 포함, 세계 91개국이 가입돼 있다. 호적을 조작해서 아이를 해외로 입양시키는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계기가 마련됐다. 한국 정부는 협약 가입을 위해 사전 준비작업을 했다. 지난해 8월 입양특례법을 바꿔 미혼모의 아이도 출생신고를 의무화했고 입양까지 7일간의 숙려기간을 뒀다. 입양을 보내려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성공한 입양아는 소수, 대부분 겉돌아

 협약은 입양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길 것을 강조한다. 우선 출생국 가정(위탁가정 포함)에서 보호할 것을 권고한다. 불가피하게 입양을 보낼 경우에도 국내가 우선이다. 해외입양이 이뤄질 때 양국 정부는 양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지 검증하고, 입양아 국적 취득을 보장한다. 입양 전반을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것이다. 가령 미국으로 입양하려면 한국 보건복지부와 미국 국무부가 책임을 진다. 정부는 입양특례법을 추가로 개정해 이런 절차를 담아 2년 후 국회 비준을 받을 예정이다.

 그동안 많은 입양인이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는 합리화 속에 외국으로 나갔다. 한국은 6·25전쟁 이래로 16만5000명의 입양아를 미국·스웨덴·프랑스 등 9개국으로 보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한 해에 2000명이 넘는 아이가 해외로 입양되다 지난해는 755명으로 줄었다.

 그중 일부는 프랑스의 플뢰르 펠르랭 중소기업혁신디지털부 장관처럼 좋은 환경에서 잘 성장했지만, 몬트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 뿌리를 찾지 못하고 배신감과 박탈감을 안고 돌아가는 입양인도 있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이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게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의 정신이다. 최소한의 인륜적 도리에 관한 약속인 셈이다.

글=장주영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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