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의 취리히통신] 우리 집에선 4개 언어 말하는데 베트남댁은 한국말 강요받네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카탈루냐어 책을 판다는 이유로 1970년대 발렌시아 극우세력으로부터 폭탄테러를 당했던 ‘Tres i Quatre’ 서점. 얼마 전 문을 닫은 이 서점 셔터에는 지금도 ‘카탈루냐 XXX’‘ 카탈루냐 꺼져라’등 의 욕설이 도배돼 있다. [사진 Tres i Quatre]

몇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일입니다. 남편·아기와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저희가 대화하는 걸 한동안 듣고 있던 기사님이 한마디 하십니다. “아기가 정신이 없겠구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아기에게 저는 한국말을 합니다. 남편은 스페인어, 아니 정확히 카탈루냐어를 씁니다. 남편과 저는 영어로 대화를 하지요. 게다가 우리 가족이 사는 스위스 취리히의 공식 언어는 독일어입니다. 4개 언어를 동시에 듣는 아기가 혼란스러울 법도 합니다. 이런 환경의 아기들은 다른 아기들에 비해 말이 터지는 시기가 좀 늦긴 하지만 나중엔 여러 언어를 모국어로 습득하게 되지요. 스위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이른바 ‘다문화가정’의 비중이 큰데, 대부분의 부모가 이처럼 아기에게 각자의 모국어로 말을 합니다.

 택시 기사님의 말이 이어집니다. “우리 며느리가 베트남 출신이야. 그런데 나는 며느리가 손주한테 베트남어 절대 못 하게 해. 아기가 한국어를 배워야지.”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면 베트남어로 말하는 게 편할 텐데요. 아이가 한국어도 하고 베트남어도 할 줄 알면 좋잖아요.” “베트남어 해서 뭐 해. 한국에서 살 건데.” 그 대답에 복잡한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스페인어는 지역마다 쓰는 언어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페인어는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쓰는 카스티야어입니다. 이외에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쓰는 카탈루냐어와 바스크어·갈리시아어 등으로 나뉩니다. 스페인에서 언어는 곧 정치입니다.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 당시 스페인 전역에서 카스티야어만을 쓰도록 했기 때문이죠. 일제시대의 한글 말살 정책을 연상시키는 부분입니다. 이에 반발한 각 지방에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고유 언어를 살리려 노력했고, 그건 독재가 끝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얘기를 계속하지요. 우리는 딸의 동화책을 사기 위해 발렌시아에서 가장 큰 서점에 들렀습니다. 남편이 원한 건 카탈루냐어로 된 동화책. 하지만 뜻밖에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린이 코너는 대부분 카스티야어로 된 책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카탈루냐어로 된 책을 몇 권 골라 계산대로 갔습니다. 그때 옆 계산대에서 누군가 크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왜 카탈루냐어로 된 어린이 책이 갈수록 줄어드는 거죠? 애들에게 우리가 쓰는 말로 된 책을 사주는 게 왜 이리 어렵냐고요.” 그러자 계산대의 직원들이 수군댑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야. 카탈루냐어 책을 찾는 고객들 항의 때문에 피곤해 죽겠어.”

 이는 발렌시아 지방정부의 우경화와 무관치 않습니다. 스페인에서는 보수적인 지방정부가 들어서면 지역 고유의 언어 대신 카스티야어로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이는 가장 먼저 서점의 책 종류에 영향을 미칩니다. 1970~80년대 발렌시아에선 종종 카탈루냐어 책을 파는 서점이 극우세력의 폭탄테러 대상이 되기도 했죠. 남편이 투덜댑니다. “이러니 다들 독립을 하겠다고 난리지. 이럴수록 난 외국에서 스페인 사람이라고 말하기 싫어져. 발렌시아 사람이라고 하는 게 속 편해.”

 한국의 다문화 정책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과 그 자녀에게 한국어 교육을 유독 강조하고, 김치 담그는 법과 한복 입고 절하는 법을 가르치는 그 정책 말이지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한국어만 하는 게 과연 그들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또 한국인들은 ‘외국인 며느리’를 받아들일 때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함께 산다는 건 어느 한 편의 문화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진경 통신원 jeenkyungkim@g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