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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리뷰] 증오 - 세상을 다 불태워 버려라

중앙일보

입력

마티유 카소비츠감독의 '증오'는 마틴 스콜세지를 흠모하였던 감독의 스콜세지에 대한 오마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관객들을 향하여 손가락을 겨누는 빈쯔는 '택스 드라이버'의 트레비스이며 샌드벡을 슬로우 모션으로 두들기는 위빼르는 자연스럽게 '성난황소'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증오'는 '성난황소'처럼 흑백으로 처리되었다) 감독은 여기서 군데군데 타란티노와 오우삼을 끌여들이더니 급기야 앤딩에선 스콜세지와 타란티노를 접속시켜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94년 프랑스, 경찰의 실수로 인한 발포로 숨진 한 청년의 실화로부터 이야기를 발전시킨 영화 '증오'는 이민족인 유태인 빈쯔와 아랍계 사이드 그리고 흑인인 위뻬르가 벌이는 하룻동안의 행각을 다룬 영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9시간 23분동안 이들 삼인조가 추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컬러로 촬영되어 흑백처리된 영화의 유일한 컬러부분인 오프닝은 화염병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 지구를 보여주며 50층에서 떨어지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50층 건물서 떨어지는 사내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괜찮아. 추락하는 건 중요한게 아냐. 문제는 어떻게 착륙하느냐지"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감독은 그렇다고 이들 삼인조를 영웅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이들은 같은 이민족이나 (중국계가 운영하는 수퍼마켓) 하층민에게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여인) 동족의식을 보여주지 않으며 마약을 즐기고, 그들의 동료는 술집 문앞에서 기도에게 총질하고, 갈 곳이 없을 경우 화랑으로 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전형적인 룸펜들이다. 즉, 감독은 영화를 통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현상그대로 그려냄으로써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급진적이며 다혈질인 빈쯔는 시위도중 중태에 빠진 16세의 아랍계 청년 아사하가 죽기라도 하면 경찰을 쏴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내인다. 그가 꿈속에서나 현실속에서 보게되는 '소'는 빈쯔가 곧 죽게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이 잊어버린 총을 습득케 된 빈쯔에게 위뻬르는 범퍼역할을 한다. 자신이 운영하던 체육관이 쑥대밭으로 변한 뒤에도 위뻬르는 이성을 잃지않고 빈쯔의 돌출행동을 저지한다.

하지만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사태에 반항적이던 빈쯔나 순응적인 위뻬르가 앤딩으로 치달으며 오히려 성격이 뒤바뀌고, 그러한 성격변화와는 상관없이 두사람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있다. 즉, 이민족 출신의 하층민이 당시 프랑스의 특정구역서 경험하게 되는 운명이란 체제에 대한 개개인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에 있음을 감독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카소비츠는 직접 각본과 편집까지 담당하였던 자신의 장편데뷔 영화로 95년 칸영화제서 감독상을 수상한다. 이후 감독은 '증오'의 연장선상에 있는 '암살자(들)'을 2년 뒤 발표하지만 2000년 '크림슨 리버'로 헐리우드 프랑스무비의 조류에 편입한다.

감독의 재기발랄함은 영화 곳곳에 숨어있다. 가령 위빼르와 사이드를 연기한 배우들은 자신들의 원래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극중 사이드의 여동생은 빈쯔에게 "뱅상오빠아냐?"라고 잘못 묻는다. (빈쯔를 연기한 사람은 뱅상 카셀이다.) 아스테릭스 (한글 및 영문자막상으론 스누피로 불리우는)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는 '카셀'이란 이름이 등장하며, 얼마전 영화 '아멜리에'로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 감독은 잠시 스킨헤드족으로 등장키도 한다. 삼인조에게 시베리아 징용도중 얼어죽은 그룬발스키란 사내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떠나버린 중년의 사내가 있었던 화장실엔 단어, 증오 (LA HAINE}를 연상시키는 하이네켄 (HEINE-KEN)맥주 포스터가 정면에 걸려있다.

영화가 시간으로 구분되듯 (이 시간이란 것도 1시간반 혹은 2시간정도의 인터벌로 임의로 구분되며 삼인조가 겪는 하룻동안의 흘러가는 시간이상을 의미하진 않는다.) DVD 챕터구분도 영화상의 시간구분에 맞추어져 있다. 흑백영상을 고려한다면 꽤 높은 비트레이트인 9.80Mbps로 수록된 1.85:1 화면비의 영상은 촬영감독 피에르 앵의 독특한 카메라각도와 함께 아름다운 영상을 아무런 문제점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비록 프랑스버젼의 DD5.1채널과는 달리 사운드는 384Kbps의 DD2.0로 녹음되었으나 떠벌이 삼인조의 대사전달이나 댄스와 함께 흘러나오는 O.S.T.음악들과 차량이나 오토바이의 효과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메뉴화면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어쩌면 이스트에그에 가까운 성격을 띄는데, 다음 메뉴로 넘어가지 말고 가만히 듣게되면 꽤 길게 녹음되었음을 알게된다. 메뉴화면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끝까지 들어보는 것도 '증오' DVD를 제대로 즐기는 한가지 방법!) 서플로는 영화 줄거리와 배우/감독의 이력, 극장용 예고편 2가지, 삭제씬들과 포토 갤러리가 수록되어 있다.

영화도중 간간히 관객들을 향해 총을 겨누며 윽박지른다던가 씨익 웃어보이는 빈쯔나 위뻬르의 표정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선동적이다. 거기다가 오프닝과 앤딩, 그리고 에펠탑을 바라보며 빈쯔에게 위뻬르가 해주는 추락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떻게 사느냐'는 것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관객들에게 오프닝의 화염병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조성효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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