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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페라20년|「춘희」공연을 앞두고····회고와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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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 「오페라」20주년과 김자경 「오페라」단 창립기념으로 중앙일보·동양방송이마련한 「베르디」의 가극 「춘희」가5월1, 2일밤 서울시민회관에서 막을 올린다. 이 기념공연을계기로 한국 「오페라」20년의 발자취와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였던당시의 「춘희」 무대를 회상해조본다.
오=우선 김자경여사의 의욕적인「오페라」단창단에경의를 표합니다.한국의 첫「오페라」 공연이 1948년1월 고이인선선생의 주동으로 시공관(현국립극장)에서 「춘희」 로 막을 올렸으니까 올해로 꼭 20주년이 되는군요.
김=그해 겨울이 어찌나 추웠던지 이화유치원 (현「젠센 기념관자리) 에서 언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연습하던게 엊그제같고 눈을 감으면 「알프레드」역을 맡았던 이인선선생님의 뜨겁게 구애하던(웃음) 「테너」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이= 「이탈리아」 에서 돌아온 형님(이인선)이 해방되어 나라찾은 기쁨으로 주동이된 탓도 있지만 그때의 의욕이나 보람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경무국장이던 유석 고조병옥박사같은분은 공연허가에서 의상문제까지 발벗고 나서 염려해준 「스폰서」였죠. 일제때에도 공연한번 못한 「오페라」를 우리손으로 처음 막을 올려놓은 것은 우리의자랑입니다.
김=마금희씨와「비올레타」역을 나눴지만 한회를 끝내고 마금희씨가 쓰러져 혼자서 5일동안 10회의 공연을 하느라고 녹초가 되었읍니다.
이=일요일에는 3회공연까지 했잖습니까.
김=미국에 있을때 그런얘기를 하니까 『아직 목소리가 남아있느냐』고 신기해하더군요.난방장치없는 추운 무대에 서면 눈썹에는서리가 내리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생겼고, 불쬐라고 피워놓은 숯불에 숯내 맡고 쓰러지는 사람이 줄을잇고 의사가 줄곧 붙어살았었죠.
오=어느「소프라노」는 목소리 좋으라고 달걀을 꾸러미로 갔다놓고 깨먹다가 설사가 나서… (웃음). 그때의 「오페라」에대한 상식이나 수준이 가관이었읍니다.
어느신문은 「라·트라버아타」를 「라·쿰파르시타」라고 의젓하게 바꿔놓고는 『펫병으로죽어가는 「비올레타」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느냐』 고 (웃음) 나무랐죠.
김=박승유씨 가족은 아버지이하 총동원되어 구경나왔다가 박씨가 2막에서『편지요』한마디만 부르는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 집안망신이라고 호통을 내렸다는군요 (웃음).
이=그렇게 손님이 많울수가 없었습니다. 관객들은 터질듯이 층계까지 꽉찼지만, 표를 살수없어 기도에게 현금을주고 그냥밀고들어와 그많은 관객에게도 불구하고 형님은 적자를 메우느라고 공연이 끝난뒤 집을 팔아야했죠.
김=고려교향악단의 임원식씨, 합창단의 이유선씨, 줄곧 「오페라」에 몸바쳐온 황병덕씨 그리고 여기오현명 옥인찬 김혜난, 납북된 고종익 정영재, 연출의 서항석 무대장치의 김정환씨등 20여명의 그때 「멤버」들의 애쓰던 모습이 지워지지않아요.
오=그덕으로 그해4윌에 재공연을 해야했고 오페라」20년에 모두20회 공연중춘희가 이번으로 5회째로 공연횟수에 으뜸이고 「카르멘」이 4회로 다음입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춘희,「카르멘」고현제명선생의「춘향전」 한국」「오페라」단의 「토스카」등입니다.
이=49년 한불문화협회의「파우스트 50년국제 「오페라」의 「카르멘」서울대음대의 「춘향전」 (현제명곡) 피난시절인51년부산대구에서의「콩쥐팥쥐」(김대신곡) 수복후 「왕자호동」 (현제명곡)등이었습니다. 그때는 창작「오페라」도 오히려 지금보다 풍성했죠. 「오페라」단도 국제에서 「프리마」,한국,고려,서울등이 있다가62년 발전적으로 통합되어 국립「오페라」단으로 뭉쳤읍니다.
김=제가 이번 「오페라」단을 세계부대로 발둗움하는 기틀로 삼으려는 것은「라·스칼라」좌에 서는것이 꿈이기도했고 55년 미국의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된 「드니제티」 의 「루치아」를 본감명 때문입니다.
「릴리·폰스」 「탈리아핀」이 노래불렀는데 1막이 끝나면서부터 흐르는 눈물을 감출수 없어 3막이 끝날때는 엉엉 울어 얼굴이 퉁퉁부었었죠. 그들의 좋은환경이 너무부러웠을뿐아니라훌륭한노래솜씨들때문이었죠.
이=비숫한 경험을 나는35년 「시카고」에서 「토마」의 「미뇽」을 보았을때 했어요.
오=64년 국립 「오페라」단이 공연한 「토스카」에서 처음 흑자를 냈었지만 「오페라」 계는 어려운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제가 최근 일본에 가서 느낀건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일본의「오페라」지만 가수 실력은 우리에게못미칩니다.
동양의 「이탈리아」라는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에겐 인재가 넉넉합니다.
그러나 무대뒤를 손봐줄사람이 없어요. 말하자면 예술은 성숙돼있지만, 그를뒷받침할 「매커니즘」이 말이아닙니다.
이=그뿐입니까. 「오페라」극장하나있습니까. 인재를양성할 기관이 있읍니까.
나라에선 체육을 위해 기업체들이 내놓는 경비만큼 면세특전을 마련하면서도 음악단체에는 외면하는 실정입니다.
오=개인의 힘으로 「오페라」단을 꾸려나가는게 힘들지만 뜻이 큽니다.우리국립 「오페라」단에 자극도되고 선의의 경쟁속에서 서로 북돋워 나갈 계기가되었으면 합니다. 용두사미꼴로 끝나지 말고 앞으로많은 비약을 기대합니다. 그런뜻에서 이번 창단기념과 한국 「오페라」 20주년을 기념을 겸한「춘희」공연은 여러가지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말하신분>이유선<중앙대교수>김자경<김자경오페라단 단장>오현명<국립오페라단 단장> 11 일하오 4 시·본사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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