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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멤피스 이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만약 싸움을 벌이게된다면 그게 비록 거리에나가 검둥이를 쏘아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을 상대하여 「미시시피」주를 위해 싸우겠다.』이말은 1956년 흑백문제가 한창 시끄럽게될 무렵 「윌리엄·포크너」가 기자회견에서 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인용된 부분만으로는 매우 과격한 표현이어서 듣는측에서는 어안이 벙벙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문학이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가장 깊이있게 파헤칠수 있는 형식이라고 한다면 사실 「포크너」만큼 미국의 흑인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도 좀체없으리라고 생각될이만큼 그의 작품에는 「남부(남부)에 있어서의 「흑인의 조건」에대한 깊은 통찰이 숨어있다. 그만큼「살갗의 생리」는 어려운 것이다.
「포크너」의 이 발언에 대하여 흑인작가인 「제임스·볼드윈」은 그를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더할나위 없이 불성실한 작가』라고 공박했다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무엇보다도 값진 것으로 받아들인 「포크너」로 그러한 발언(비록 실언이었다고는 하지만)을 하게만든 역사적 사회적사정은 심각하기 이를데없는 듯 하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점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보아야할 흑인문제의 중심도 백년전의 『톰 아저씨의 오두만』식 인도주의적 「센티멘털리즘」에서 벗어나야할것같고 「리처드·라이트」의 『토박이 아들』(1940)의 단순한 사회항의와도 초점이 달라져야만 되겠다.
흑백의 계쟁(계쟁)이 「아메리카 민주주의치부(치부)」라는 정치적 사회적 표현과는 별도로 이미 검둥이는 인종적편견에서 오는 어떤 저자세나 열등감도 거부하고 있는 자신에 차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볼드윈」의 말을 빌것같으면 『빛깔(인종)은 인간적 개인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현실』일 따름인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엊그제 「멤피스」에서 일어난일은 고통에 차고 매우수치스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다대수의 미국인이 서둘러야할점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얼마간의 시간」마저도 되도록 단축시키는데 있지 않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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