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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66) 80년 교통부 장관 첫 입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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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1년 2월 19일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 삼정동에서 ‘호남선 복선화 공사’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열렸다. 외길이었던 이리와 전남 송정리 101㎞ 철도 구간을 복선으로 만들고 터널과 교량을 추가하는 공사다. 기공식장 단상에 고건 당시 교통부 장관, 전두환 대통령, 이순자 여사, 황해중 철도청장(왼쪽부터) 등이 서 있다. [사진 고건 전 총리]

1980년 9월 2일 난 교통부 장관에 임명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 주재로 만찬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 궁정동 안가의 저녁 자리에 가보니 천명기 보건사회부 장관과 김기철 체신부 장관이 와 있었다. 새로 임명된 13명 장관 중에 3명만 초청됐다. 천 장관은 신민당, 김 장관은 민주당 의원 출신이었다. 각료 인선을 하면서 발탁한 야권 인사였다.

 첫 장관직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고 그 전 경험을 바탕으로 교통행정 3원칙을 만들었다. 취임사에서 “생활교통·안전교통·생산교통 세 가지를 교통행정의 지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임명된 그 주 일요일 경춘선 열차를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타봤다. 이후에도 틈날 때마다 열차와 버스를 이용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봤다.

 취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2시쯤 요란하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더니 잔뜩 화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렸다. “장관님, 지금 기차가 1시간 째 출발하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경북 안동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안동발(發) 0시50분 기차의 출발이 한참이나 늦어지자 화가 폭발한 승객이 장관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114로 전화해 ‘고건 교통부 장관 집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면 친절하게도 안내해 주던 시절이다. 국민의 얘기인데 어찌 할 도리가 있나. 화를 달래주고 “바로 알아보고 조치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알아보니 열차가 고장 난 것도 아니었다. 이 시절엔 열차나 버스의 연발과 연착이 잦았다. 거스름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고도 성장기였던 만큼 원자재를 실어 나르고 물품을 운반하는 교통의 산업적 측면만 중요시 됐다. 국민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동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잠이 확 깼다. 날이 밝을 때까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호텔에서 본 ‘고객 불편·불만 신고카드’가 생각났다. 카드를 엽서로 만들었고 거기에 민원을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바로 교통부 장관실로 배달되도록 했다. ‘교통불편신고엽서’는 그렇게 탄생했다. 열차에서 시작해 택시와 버스로 확대했다. 호응은 뜨거웠다. ‘버스 안내원이 밀어서 빙판에 넘어졌다’는 초등학생 항의부터 ‘경로석에 젊은이가 앉아서 양보를 안 한다’는 할아버지 글까지 1만 통의 엽서가 장관실로 쏟아졌다. 우선 국·과 단위에서 민원을 해결하도록 했다. 실무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민원은 직접 챙겼다. 장관이 직접 주재하는 주말 회의를 열어 해결책을 논의하고 마련했다. 그렇게 10주 연속 장관 주재 회의를 했더니 실무선에서 교통 민원을 해결하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택시에 대해 승차 거부, 부당 요금, 합승 강요 등 불편 신고가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개인택시 허가제도로 증차 수요를 맞췄다. 지금은 별 차이가 없지만 당시 개인택시가 회사택시에 비해 고객 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많았던 버스노선 정책도 손질했다. 버스업체들은 수익이 많이 나는 황금노선만 차지하려고 하고 돈이 안 되는 벽지노선은 결행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황금노선을 받은 회사는 벽지노선도 의무적으로 운행하도록 끼워서 배정했다.

 그런데 1981년 초 철도청에서 난감한 보고가 올라왔다. 손님이 적어 적자가 난다며 새마을호 호남선을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호남 출신 장관인 나에겐 뜨거운 감자였다. 황해중 철도청장과 함께 고민을 하다가 서대전역 이하 호남선 운임을 20% 할인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감사원 감사 때 문책을 받을 수 있다는 철도청 간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국무회의에 양해 사항으로 보고하고 장관이 책임지겠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남겼다. 할인 정책은 효과를 봤다. 호남선 새마을호 손님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운행 횟수도 늘어났다. 적자 노선이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행정에는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다. 노자가 얘기했듯 나라를 다스릴 때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 같은 정성(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을 쏟아야 한다. 교통부 장관을 하며 깊이 새긴 교훈이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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