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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보이’가 전쟁 영웅으로 … 전후엔 반공<反共> 앞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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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호 24면

윈스턴 처칠이 1940년 총리 집무실에 앉아 있다. 프랑스 점령 뒤 미국이 참전에 소극적인 가운데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 전 세계에서 영국만 나치 독일에 맞서던 시기였다. [위키피디아]
1940년 군 부대를 시찰하던 처칠이 트레이드 마크인 시가를 물고 토미 기관단총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지난달 26일 2016년부터 사용될 새 5파운드 지폐에 윈스턴 처칠(1874~1965) 전 총리의 초상화를 넣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머빈 킹 총재는 “전체 자유세계의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⑤ 윈스턴 처칠

처칠은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총리다. 2002년 BBC 조사를 비롯해 역대 총리 인기 조사에서 처칠은 항상 부동의 1위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시 총리(40~45년 재임)였던 그는 “국민 여러분께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밖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우리의 정책은 온 힘을 다하여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싸우는 것입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로 국민을 단결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자신감과 설득력 그리고 웅변을 무기로 나라 운명이 경각에 이른 전시 상황에서 의지와 확신 그리고 추진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평생 10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제2차 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처칠의 리더십은 영광의 순간에서만 빛을 발휘한 게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순간에 빛났다. 처칠은 인생 내내 숱한 굴곡과 고난을 겪었다. 자신의 뜻대로, 장애물 없이 일이 쉽게 풀린 적은 드물었다. 그 속에서 오뚝이 같은 불굴의 삶을 살았다.

정당과 선거구 옮겨 다닌 정계 문제아
처칠은 남들이 가는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그는 자유당 소속 의원으로 통상·내무장관을 거쳐 해군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의회를 어렵게 설득해 군함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고,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도입을 기획하는 등 획기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속전속결로 끝내자는 생각에서 적국인 오스만 튀르크 수도 이스탄불 근처에 영국군(주로 호주·뉴질랜드 출신 부대)을 상륙시키는 갈리폴리 작전을 입안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는 패배 책임을 지고 내각을 떠나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서부전선으로 달려갔다. 현역으로 복귀한 그는 1915~16년 로열 스코트 퓨질리어 부대 대대장으로서 최전방에서 싸웠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는 갈리폴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꺼져가던 정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었다.

1904년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옮긴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뒤 자유당의 인기가 떨어져 1922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1923년 보궐선거에서도 의회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는 인기 없는 정당 간판으로는 더 이상 당선되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무너져가는 자유당을 탈당했다. 또 다른 보선에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1924년 총선 때 간신히 당선했다. 이듬해 그는 보수당으로 돌아갔다. 21년 만의 복귀였다. 의원이 소속 정당을 옮기는 일이 드문 영국에서, 그런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가 많았다. 지역구도 지나치게 자주 옮긴 게 사실이다. 그는 정면으로 대응했다. “쥐가 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다시 쥐가 되는 일은 용기 있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자신을 쥐로 비하하며 철새 논쟁(당적 이동)에 대해 사과하고 해명한 것이다.

보수당으로 복당한 뒤 스탠리 볼드윈 총리 내각에서 서열 2위인 재무장관까지 올라간 처칠은 1925년 파운드화의 금본위제도를 부활시켜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심각한 디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 파업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총파업에 나선 노조를 강경 진압함으로써 격렬한 비난을 초래해 자신은 물론 보수당의 지지도까지 심각하게 떨어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인도 병력을 참전시키는 대가로 약속했던 인도의 자치권 확대, 심프슨 부인과의 스캔들로 곤경에 빠진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등에도 반대했다. 보수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 그 결과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이단아’ ‘문제아’로 평가받았다. 보수당은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해 야당이 됐으며 처칠은 총선 책임론에 시달려야 했다.

보수당은 1935년 재집권했으나 내각 기용에서 처칠을 철저히 외면했다. 처칠은 1929년부터 10년 동안 다선(多選) 평의원으로서 ‘정치적인 황야’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처칠은 나치 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고 언제라도 무력을 쓸 수 있는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치 독일의 공군력 증강을 눈여겨보며 영국도 강력한 공군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군비 강화론을 펼쳤다. 하지만 당시엔 유화정책이 대중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전쟁 전야에 처칠은 홀로 외롭게 대중정치의 흐름에 맞서야 했다.

종전 직후 복지 확대 거부하다 실각
그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장관을 맡아 내각에 복귀했다. 해군부는 즉시 전 함대에 긴급 타전했다. “처칠이 돌아왔다.” 나치 독일의 호전성을 미리 내다봤던 그를 군 장병들이 얼마나 신뢰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이듬해 5월 처칠은 압도적 지지를 얻어 총리를 맡아 전시연합내각을 이끌었다.

영국이 외롭게 전쟁을 수행하던 개전 초기부터 처칠은 단호한 리더십으로 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다. 패배도 항복도 타협적인 평화도 거부했다. 어떤 의원이 “독일과의 전쟁(war with Germany)”이라고 하자 그는 “독일과의 전쟁이 아니오, 독일에 맞선 전쟁(war against Germany)으로 고치시오”라고 고함치기도 했다.

하지만 처칠은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태평양전쟁이 마무리 수순을 밟던 1945년 7월 총선에서 패배했다. 독일 포츠담에서 미·소 정상과 함께 전후 체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하던 그는 협상 대표 자리를 새로 총리가 된 클레멘트 애틀리 노동당수에게 황급히 넘겨주고 귀국해야 했다. 처칠 정권이 복지보다 군사력 확대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정권을 잃은 것이다. 사회보험위원회 위원장인 윌리엄 베버리지는 전쟁이 한창인 1942년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전후 사회개혁 보고서를 내놨다. 하지만 보수주의자 처칠은 복지국가론에 냉담했다. 이를 본 영국인들은 처칠과 보수당에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퇴임 직전까지 유엔 창설을 비롯한 전후 질서 재편의 상당 부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질서는 오늘날까지도 상당 부분 유효하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의 독립도 포함됐다.

처칠은 1951년 총선 승리를 통해 총리 자리에 복귀했다. 내정에 주력한 시기다. 정권을 잃었던 뼈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국가 재건 과정에서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매년 30만 채의 서민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주택난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주목할 부분은 반공 전선 구축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세력 확대에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대처했다. 특히 1948년부터 계속되던 말레이 식민지(현 말레이시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말레이민족해방군(MNLA)의 게릴라전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증파해 소탕작전을 펼쳤다. 다른 한편으론 농촌지역에 대한 의료·식량 지원을 강화해 현지 민심을 장악해 나갔다. 그 결과 1954년까지 게릴라의 3분의 2를 소탕하고,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터진 6·25전쟁에도 적극 개입해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병력을 유지했다.

냉전에 대한 경고와 공산주의 확산 저지는 처칠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다. 1946년 미국 방문 땐 한 연설에서 ‘철의 장막’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핵심 수단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였다. 1944년 한 연설에서 미·영 사이를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라고 지칭한 이래 처칠은 미국과 손잡고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4년에 걸친 집권 2기 동안 미국을 네 번이나 공식 방문했다.

처칠의 할아버지는 7대 말버러 공작으로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다. 초대 말버러 공작은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전쟁영웅이다. 이런 가문의 배경은 전후 처칠이 프랑스 주도의 유럽통합 운동을 배척하고 미국과 손잡은 이유의 하나로 설명된다. 셋째 아들인 그의 아버지 존은 정치인으로 입신해 재무장관을 지냈으나 모난 성격 때문에 정적이 많았다. 처칠이 유머와 설득력 있는 연설 능력을 기른 것은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은 덕택이라는 게 중평이다.

끈질긴 발성 연습으로 혀 짧은 소리 극복
처칠은 귀족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때론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만큼 철저한 보수 성향은 여기서 나온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이는 굳건한 의지라고도 평가받는다. 연설 능력도 그중 하나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어려서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처칠은 언어장애까지 있었다. 그의 연설은 더듬거리는 소리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혀 짧은 소리가 문제였다. 그는 수많은 발성 연습으로 이런 약점을 극복했다. ‘연설의 귀재’는 타고난 게 아니라 치열한 훈련 덕이었다.

군 진출이 많은 사립명문인 해로 칼리지를 졸업한 처칠은 세 차례 시도 끝에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보병 대신 인기가 덜한 기병으로 들어갔다. 졸업 성적은 150명 중 8등이었다. 보병으로 병과를 바꿔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사양하고 기병으로 남은 것도 처칠 특유의 성격을 말해준다.

물론 집안 배경의 덕을 볼 때도 있었다. 그는 인도의 말라칸드, 수단의 옴두르만의 반란 진압 작전에 투입돼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현지 파견 땐 사교계의 여왕이자 미국 갑부 집안 출신인 어머니 지니가 군 고위층에 로비를 해준 게 효과를 발휘했다. 지니는 아들이 참전기를 책으로 내자 군 고위층을 직접 찾아 이를 홍보하는 등 치맛바람을 날렸다. 하지만 지니는 1885년 남편이 세상을 뜬 뒤 1900년엔 아들과 동갑내기인 군 장교, 1918년엔 아들보다 세 살 적은 식민지 공무원과 연거푸 재혼하며 사교계의 가십 메이커가 됐다.

처칠은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전쟁 종군 도중 포로가 됐다. 하지만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탈출을 감행한 뒤 480㎞를 걸어 중립지역인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모잠비크)에 도착했다. 그의 이미지가 ‘귀족 집안 마마보이’에서 전쟁영웅으로 바뀌고, 이듬해 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것은 가문의 배경도 어머니의 치맛바람도 아니었다. 처칠의 강철 리더십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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