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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독특한 레시피로 빚은 집밥 같은 맥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경리단길 인근에 문을 연 크래프트 비어 전문점인 ‘더 부스’(왼쪽 사진). 북한 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낫다고 평가했던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다니엘 튜더가 공동 투자했다. 아래 사진은 ‘크래프트웍스’에서 제공하는 크래프트 비어 샘플러.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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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에 코를 갖다 대면 잘 익은 오렌지향과 송진 냄새가 납니다. 보디감은 묵직하지만 맛이 신선해 부담스럽지는 않고, 새콤한 산미가 부각되네요. 피니시에선 약간의 알코올이 느껴지지만 역하진 않습니다.”

국내의 한 맥주 동호회원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일본 크래프트 비어(craft beer) 순례기의 한 토막이다. 잠깐. 와인이 아니라 맥주라고? 맞다. 와인만 ‘보디감’을 논하고 ‘피니시’를 따지는 게 아니다. 맥주도 레시피에 따라 특유의 향과 ‘보디감’ ‘피니시’를 달리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술이다. 물·맥아·홉·효모의 네 가지 기본 재료를 어떻게 다루는지, 어떤 향신료를 첨가하는지에 따라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크래프트 비어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독특한 레시피로 공들여 빚은(craft) 맥주다. ‘수제 맥주’ ‘부티크 맥주’ ‘장인 맥주’ 등으로 불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소규모 양조장(마이크로 브루어리)이 허가되면서 나온 ‘하우스 맥주’도 크래프트 비어의 일종이다. 하지만 현재 하우스맥주 업계는 150개(2002년 당시)에서 35개 정도만 남은 상황이다. 그나마도 국내 주세법상 여러 규제에 묶여있다 보니 흥행이 잘되는 바이젠(밀맥주), 필스너(황금빛 라거), 둥켈(흑맥주) 삼총사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하우스 맥주는 비슷비슷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사실 이런 ‘안전한’ 선택은 크래프트 비어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 인근에서 크래프트 비어 전문 펍을 운영하는 캐나다인 에릭 모이니헌은 “크래프트 비어의 에센스(정수)는 실험정신”이라며 “아무도 안 할 것 같은 시도를 해보면서 독특한 맥주의 맛을 창조해가는 게 크래프트 비어의 재미”라고 말했다.
 
생선가게 골목길 안 크래프트 비어 펍
크래프트 비어 매니어인 주한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최근 1~2년 새 크래프트 비어의 새로운 트렌드가 생겼다. 기존 하우스 맥주와는 달리 자기들만의 레시피로 만든 크래프트 비어를 위탁 양조한 뒤 판매하는 전문 펍이 문을 연 것이다.

크래프트웍스에서 개발한 맥주엔 각각 한국의 산 이름이 붙어 있다.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맥주라는 ‘남산 필스너’와 봄철 한정 판매 맥주인 ‘관악산 쾰쉬(사진)’ 등이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 용산의 경리단길 인근이 그 중심지다. 임대료가 이미 많이 오른 경리단길에서 녹사평 쪽으로 한 블록 더 올라간 허름한 골목길이 ‘크래프트 비어 골목’으로 뜨고 있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인 생선가게며 ‘영양탕’ 메뉴가 걸린 식당과 어울려 묘한 풍경을 연출한다. 경리단이나 이태원에서도 이 지역의 크래프트 비어를 받아다 판매하는 바(bar)들이 늘어나고 있다. 크래프트 비어 인기 확산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셈이다.

모이니헌은 집에서 맥주를 취미로 만드는 ‘홈 브루잉’을 하다 뜻이 맞는 미국·캐나다 친구들과 공동으로 펍 ‘맥파이(Magpie)’를 오픈했다. 변변한 간판 하나 달지 않았지만 항상 만원이다. 워낙 인기가 많아 최근엔 바로 앞 지하에 2호점을 열었다. 그나마도 자리가 없어 사람들은 에일을 들고 나와 길거리에 서서 마시곤 한다. 영국 런던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퇴근길 풍경과 꼭 닮았다.

크래프트 비어 골목의 원조를 따지자면 이 두 곳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크래프트웍스(Craftworks)’가 있다. 맥파이는 아직 두 종류의 에일(ale)을 간판 메뉴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크래프트웍스는 8개가 넘는 크래프트 비어를 취급한다.

‘금강 다크 에일’부터 ‘지리산 반달곰 인디언 페일 에일’ 등 한국의 산 이름을 따온 맥주 이름도 특이하다. 크래프트웍스의 공동 대표 알리시아 프레데릭스는 “한국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두 가지인 산과 맥주를 접목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각각 독특한 레시피를 통해 감귤·초콜릿·에스프레소 등의 풍미를 더했다. 이곳의 공동 운영자 7명도 모두 미국·캐나다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다.

지난 10일엔 맥파이 바로 옆에 또 다른 크래프트 비어 펍 ‘더 부스(The Booth)’가 오픈했는데, 공동 창업자가 흥미롭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인 다니엘 튜더다. 지난해 11월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라는 기사를 써서 국내 맥주업계·소비자는 물론 관련 부처까지 발칵 뒤집은 장본인이다. 7월엔 아예 이코노미스트를 그만둘 작정이다.

튜더는 펍을 연 계기에 대해 “북한 기사만 자꾸 쓰는 것도 지루해졌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면서도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 다양한 맥주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맥주는 폭탄주로 만들어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로 인식돼 있다 보니 맥주가 개성이 없어졌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신의 기사가 나간 이후 국내 언론에서 보인 관심에도 놀랐다고 한다. “무엇보다 국내 언론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놀랐다. 한국 맥주가 맛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95%가 넘는 한국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동감을 표시하는 걸 보면서 크래프트 맥주 펍을 오픈할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올해 초, 한국인 친구 두 명과 의기투합해 펍을 내기로 하고 주한 외국인 중 유명한 브루마스터(brew master·양조 장인)를 섭외해 레시피를 받았다. 브루마스터의 이름이 ‘빌’이어서 이름도 ‘빌스 페일 에일(Bill’s pale ale)’이다. 톡 쏘는 홉의 맛이 강렬한 맥주인 페일 에일(pale ale)의 전형이다.

경리단길 펍 운영자들이 대부분 외국인인 데다 지역 특성상 손님도 외국인들이 많다. 대구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인 린디 하운쉴드는 “맛있는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거의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한잔 한다”며 “카스·하이트도 나쁘진 않지만 다양하고 색다른 크래프트 비어가 전국적으로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양조장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맥주
최근엔 한국인 손님들도 뚜렷이 늘어나고 있다. 크래프트웍스 공동대표인 캐나다인 댄 브룬은 “2010년 오픈 때만 해도 손님의 99%가 외국인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인과 외국인이 반반 정도”라며 “별다른 마케팅을 안 했는데 입소문으로 손님들이 꾸준히 늘었다”고 전했다.

지난 16일 저녁 경리단길 일대 크래프트 비어 펍을 순례하는 ‘펍 크롤링(pub crawling)’을 즐기던 회사원 박지열(43)씨는 스스로를 ‘크래프트 비어 매니어’로 불렀다. 그는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의 특별한 크래프트 비어를 맛보는 게 낙”이라며 “우리나라도 점점 크래프트 비어의 매력에 눈을 뜨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위의 세 펍에서 맥주 양조를 위탁하는 곳인 경기도 가평 소재 카파 브루어리의 박철 대표는 “이태원 이외에도 홍대·강남·여의도 등 80여 곳에 납품을 하고 있다. 생산량도 두 배 정도 늘었다”고 말했다.

주세법 완화 움직임 속 중견 맥주업체도 등장
크래프트 비어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 걸까. 우선 ‘라거’ 일색인 국내 맥주와 차별화되는 다양함이다. 라거는 효모를 가라앉혀 저온에서 발효시키는 하면발효 방식이다.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여과·살균 과정을 거치다 보니 청량감은 살아있지만 풍미는 떨어진다. 반면 크래프트 비어는 풍부한 맛을 위해 여과 및 살균 과정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유통기한이 짧은 대신 효모와 풍미가 살아있다. 10일 오픈한 더 부스에선 양조장에서 나온 지 2시간밖에 안 되는 ‘따끈따끈한 맥주’를 맛볼 수 있었다. 카파 브루어리의 박 대표는 “일반 맥주가 대형 식당에서 대량으로 쪄서 만든 밥이라면 크래프트 비어는 엄마가 손수 해주는 집밥”이라고 비유했다.

다양한 레시피는 크래프트 비어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크래프트웍스의 경우 가평의 농장과 계약을 맺어 오트밀(귀리)을 직접 재배해 본격적인 한국식 크래프트 맥주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2013년 2월 현재 세계 11위 규모로 연간 4조원에 달하는 한국 맥주 시장. 이 중 96.4%는 오비맥주(53.6%)와 하이트진로(42.8%)에 의해 양분돼 있다. 나머지 3.6% 중 3.3%가 수입맥주 시장이고 크래프트 비어 시장은 0.3%에 불과하다.

최근엔 다양한 맥주 수요가 늘면서 수입 크래프트 비어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마트·백화점에서 일본·유럽 등 해외 크래프트 비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병당 1만원을 훌쩍 넘기는 가격이 부담이다. 벨기에산 크래프트 비어인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한 병에 5만원을 호가한다.

국내 크래프트 비어 업계가 아직 걸음마 수준인 건 각종 규제 탓이 크다. 2002년 첫 소규모 양조장 허가가 났을 땐 영업장 외부로 반출하거나 판매하는 게 아예 금지됐다. 그러다 2008년엔 직영점에서만 외부 판매를 허용했다. 홍종학(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신규 진입자 시설 투자비용 최소화를 위해 맥주제조시설 규제 완화 ^중소 맥주제조 기업에 대해 세율을 30% 이하로 낮추는 방안 등이 담긴 주세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2010년에 다시 개정된 주세법은 기존에 2775킬로리터(kL) 이상 대규모 양조 규모를 갖춘 곳에만 일반맥주제조면허를 주던 것을 150 kL로 대폭 낮췄다. 이에 따라 제3, 제4의 중견업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중 장앤크래프트브루어리는 전북 순창에 프리미엄 맥주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공장장을 맡은 차보윤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장은 “일본의 각 지역마다 발달한 맥주 ‘지비루(地ビル)’처럼 다양한 한국만의 맥주를 만들 때가 됐다”며 “순창의 맑은 물로 빚는 프리미엄 크래프트 맥주의 등장을 기대해달라. 한국의 크래프트 비어를 세계로 수출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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