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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납치·북한 핵문제 놓고 23년간 쳇바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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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은 1990년 9월 자민당의 막후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金丸信) 전 부총재의 방북으로 처음 본격화됐다. 가네마루는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를 만나 북·일 관계정상화 교섭 개시에 합의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배상금으로 100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가네마루 측은 80억 달러를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듬해 1월 일본 대표단이 평양을 찾아 개시된 수교협상은 92년 말까지 여덟 차례 진행됐다. 하지만 92년 12월 북한은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로 알려진 이은혜가 실은 북한에 납치된 일본 여성이란 일본 측의 의혹 제기를 핑계로 교섭을 중단했다. 3년 뒤인 95년 3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전 부총리가 연립 여당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하면서 교섭이 재개됐다. 하지만 97년 2월 “일본 여성 요코타 메구미가 북한에 납치됐다”는 일본 경찰 조사가 공개되면서 교섭은 다시 표류했다.

3년 뒤인 2000년 4월 북?일은 7년반 만에 국교 정상화 교섭을 재개했다. 11차례 협상 끝에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는 처음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일본 측은 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토대로 북한에 과거 지배를 사과하는 한편 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합의를 토대로 80억 달러(일본 안)~130억 달러(북한 안) 선에서 배상금을 지불키로 가닥을 잡았다. 일본은 북한에 핵개발, 미사일 발사 동결과 핵사찰 수용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미사일 발사 연기만 가능하다고 맞섰다.

하지만 일본의 최대 현안인 납치문제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이 시인하고 사과함으로써 양측은 ‘평양 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수교가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납치 고백’으로 일본 내 반북 감정이 격화됐다. 이어 같은 해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방북해 북한의 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문제 삼으면서 2차 북핵 위기가 발발했다. 수교는 불발됐다.

2004년 5월 22일 고이즈미 총리는 2차로 방북, 납북 일본인 5명을 데리고 귀국하며 반전을 노렸다. 하지만 같은 해 북한이 일본 측에 제공한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 당국이 가짜로 판정하면서 일본의 반북 감정은 다시 격화됐다.

지지율이 급락한 고이즈미 총리는 수교를 추진할 동력을 잃었다. 그 뒤 2006년과 2009년 북한의 핵실험이 이어지면서 일본은 강력한 대북 제재에 나섰다. 양국 간 수교 논의는 오랜 휴지기에 들어갔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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