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비밀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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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북 지원과 관련해 햇볕정책 옹호론자들이 툭하면 거론하는 게 있다. 과거 서독도 동독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특히 서독도 동독에 은밀히 돈을 제공했다며 최근 불거진 대북 비밀송금 사건에 은근히 면죄부를 주려는 분위기도 있다. 과연 그런가.

통일 전 서독은 동독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 1975년부터 88년까지 지원한 액수만 2백44억마르크(약 31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는 동.서독이 공개무역을 하면서 서독이 기록한 무역수지 적자액이다.

여기에다 서독인들이 동독 친척들에게 송금한 2백억마르크와 소포로 보낸 선물 금액 1백50억마르크, 동독 방문시 물품 구입비 1백억마르크 등을 합하면 지원액수는 훨씬 많아진다.

게다가 양측은 교역을 할 때 당시 1대3 정도이던 동.서독 마르크의 가치를 1대1로 적용했다. 즉 서독이 동독 물건은 세배 비싸게 사주고 서독 물건은 3분의1 가격에 넘겨줘 동독을 도왔다. 이를 감안하면 서독의 지원금액은 1백조원이 넘는다.

서독의 동독 지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프라이카우프'다. 돈을 주고 동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사들인 것이다. 63년 어느날 루드비히 렐링거 서독 내독부 차관은 베를린 지하철에서 18만마르크가 든 가방을 동독 연락책에게 은밀히 건넨다. 동독 정치범 한명당 4만5천마르크씩 계산, 8명을 석방하는 대가 36만마르크의 절반에 해당하는 선수금이었다.

이를 추진했던 에리히 멘데 내독부 장관은 후일 "동.서독 국교가 없던 상황에서 보다 많은 정치범을 석방하기 위해 이를 은밀히 추진했다"고 회고했다. 동독 측에 대한 배려였다.

물론 정치권에서 합의가 이뤄졌고 언론도 보도금지 요청에 협력했다. 당시 석방된 한 정치범이 여러 신문을 상대로 자신의 스토리를 팔려고 했지만 대의에 공감한 신문 발행인들이 이를 거절했다.

얼마 안있어 '공개된 비밀'이 된 이 사업에 서독은 89년까지 약 35억마르크를 지불했다. 그 대가로 3만3천7백여명의 동독 정치범이 서독에 인도됐고, 25만명의 동독인이 합법적으로 서독에 이주했다. 이처럼 서독은 철저하게 동독 인권상황과 연계해 지원을 했다.

일방적 '퍼주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훗날 통일의 결정적 계기가 된 89년 동독 민주화 시위는 이렇게 씨가 뿌려졌다. 음습한 대북 거래를 합리화 하기 위해 독일의 예를 들먹이는 것은 가당치 않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