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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가문 부활 막아라 … '리틀 람보'와 후손들 특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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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87년 8월 28일, 마닐라에 있는 대통령궁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정부를 위협하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하던 때였다. 출입기자들은 코라손이 예정대로 일정을 수행할지 궁금해하며 궁 주변을 서성였다. 그때 궁 정문 앞에 헤조마르 비나이가 나타났다. 방탄조끼를 입고 중무장한 그의 얼굴은 코라손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일단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하겠다’는 람보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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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대통령궁을 출입했던 필리핀 일간 필리핀스타의 기자 안나 마리 패민투안의 글이다.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09년 그는 칼럼을 통해 정치인 비나이를 소개하며 그가 ‘람보티토(작은 람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비나이는 코라손을 등에 업고 마카티 시장만 역임했을 뿐 중앙정치 경험이 없었다. 그런 비나이가 대권에 뜻을 보이자 정계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부정적인 평을 내놨다. 하지만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깜짝 당선됐다. 최초의 지방 관료 출신 부통령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어 3년 뒤인 지난 13일 치러진 총선에서 그의 자녀 3명이 한꺼번에 당선됐다. 그제야 필리핀 언론은 ‘비나이 왕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원 의석의 절반인 12석과 지역구 하원의원 229석 등이 걸렸던 이번 총선은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의미 말고도 2016년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성격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현지 언론과 외신들이 약진한 비나이 일가와 함께 건재를 과시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1917~89) 가문을 주목한 것 역시 차기 대선에서 이들의 대결구도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4일(현지시간) 총선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더 큰 성과를 낸 쪽은 비나이 가문이라고 평했다. 비나이의 첫째 딸 낸시(40)는 처음으로 선출직에 도전해 상원에 입성했다. 둘째 딸 애비게일(38)은 하원의원 재선에, 외아들 헤조마르 주니어(36)는 마카티 시장 재선에 성공했다. WSJ는 이번 선거 결과 필리핀 정계 중심에 4명의 비나이가 등장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비나이와 연합하고 있는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마닐라 시장으로 당선됐다.

 마르코스 가문은 근거지인 일로코스노르테주에서 영향력을 다시 입증했다.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84)는 하원의원으로 재선됐고, 맏딸 이미(58)는 단독 후보로 출마해 주지사로 다시 뽑혔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들 봉봉(56)이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한 것이다. 봉봉이 이처럼 중앙무대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짐으로써 마르코스 가문은 정권 몰락 이후 최강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게 됐다.

 두 가문이 다음 대선에서 격돌할 것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비나이는 “위선 떨지 않겠다”며 선거 당일인 13일 차기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멜다는 유세기간 내내 “아들이 위대한 아버지처럼 된다면 좋겠다”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발언을 쏟아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비나이에게는 마르코스가의 ‘왕좌 탈환’을 막을 개인적 이유도 있다. 비나이가 바로 6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고 70~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반독재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주역이기 때문이다. 반정부시위로 체포된 이들을 위해 무료 법률 지원에 앞장선 그를 대중은 ‘거리 의회 소속 의원’이라며 추앙했다.

 마르코스가의 대통령궁 재입성을 막기 위해 발벗고 나설 이는 비나이 말고도 또 있다. 바로 현 대통령인 아키노다. 상원의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베니그노 주니어는 마르코스 독재 타도를 위해 애쓰다 83년 암살됐다. 이를 계기로 전업주부에서 투사로 거듭나 마르코스 정권 퇴진을 이끌고 대통령으로 취임한 코라손이 그의 어머니다. 아키노 본인은 단임 규정에 걸려 다음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상원의원 9명을 당선시키며 양원을 장악하는 이례적 성과를 거둬 후계자 양성에 큰 힘을 받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유지혜·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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