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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789년 「파리」시민들에 의하여 「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되었을 때의 일이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어느 백작이 궁전에 뛰어들어 이 소식을 「루이」16세에게 알렸다. 『그런 폭동이야 곧 진압될건데 뭘 그리 겁을 먹고 있느냐.』-「루이」 16세가 태연하게 말했다.
『이번은 폭동이 아닙니다. 혁명입니다.』
그후 1848년 2월 혁명이 한창일 때 <레·미제라블>의 작자 「빅트르·위고」도 흥분되어 군중 속을 헤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를 만난 어느 친구가 이번 사태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폭동이라면 진압될 것이지만 혁명이라면 성공할 것이 분명하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한다. 2월 혁명은 「위고」의 예언대로 시민들의 성공으로 끝났다.
74년 전의 이맘때, 우리 나라에서도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이 고부군 아문을 점거했었다. 그리고 불과 2개월 뒤에는 전주를 비롯한 전라·충청 양도를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동학난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그런 평등이라는 근대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일어난 혁명이 왜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까.
지도층간에 있어서의 분열이나 조직의 결핍 등이 그 원인으로 흔히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청·일 양국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국제정세는 동학혁명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비참한 최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혁명을 위한 내부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있었는데 말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동학혁명을 좌절케 만든 것은 바로 우리가 오늘에 이르도록 걸머져야만했던 서글픈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 헤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자립경제, 문화의 자율성, 또는 자주국방 등을 외친다. 이런 것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무력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까진 우리는 그저 이를 악물고 모든 수모와 굴욕을 참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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