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7도 엔저 용인 … 오닐의 예언 '달러당 120엔' 당겨질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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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선진 7개국(G7)이 일본의 엔저 공세를 사실상 인정했다. G7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들은 1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외곽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본의 엔저 공세를 비판하지 않았다. 하루 전 제이컵 루 미국 재무장관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엔저 공세를 질타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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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루 재무장관은 “일본의 성장문제는 이해하지만 국제규범의 틀을 벗어나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려는 시도는 자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비판을 넘어 경고라고 할 만한 발언이었다. 그럴 만했다. 엔저로 달러 가치가 요즘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루 재무장관도 글로벌 컨센서스를 깨진 못했다. 요즘 주요 나라들은 ‘세계 3위인 일본 경제를 살리는 게 세계 경제에 좋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결국 G7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들은 지난달 G20 성명을 재탕했다. “인위적으로 통화 가치를 낮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베의 엔저 공세를 비판하거나 경고하는 데까진 가지 못했다.

 일본 엔저 외교의 승리다. 구로다 하루히코(<9ED2>田東彦) 일본은행(BOJ) 총재는 “15년 묵은 디플레이션(장기 물가하락)을 거의 해결하는 우리의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양적완화(QE)가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엔저 공세가 ‘이웃(교역 파트너)을 등치는 정책(Beggar-thy-neighbour Policy)’이 아니란 주장이다.

 12일 미국 금융 전문지인 알파는 외환시장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G7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 회의에서 엔저가 다시 인정받았다”며 “‘짐 오닐의 신탁(神託)’이 더 빨리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내다봤다.

 골드먼삭스자산운용 회장인 오닐은 “내년 중순까지 미국 달러와 견준 엔화 가치가 120엔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5일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CNBC와의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그는 1990년대 최고 외환 전문가였고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을 뜻하는 브릭스(BRICs)란 말을 처음 만든 인물이다. 로이터통신은 “오닐이 올해 말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예언으로 엔화 가치가 120엔 선까지 떨어진다는 신탁을 내놓았다”고 평했다.

 지난주 말 도쿄·뉴욕·런던 외환시장에선 달러당 엔화 값이 101.62엔까지 내려갔다. 지난해 9월 중순 이후 약 8개월 만에 엔화 가치가 30% 정도 떨어졌다. 이런 속도라면 엔화 가치는 “두서너 달 안에 120엔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게 외환 전문가들의 전망”이라고 금융 전문 알파는 전했다.

 터무니없는 예상이 아니다. 2007년 이후 엔화 가치(달러 기준)는 123~75엔 사이를 오갔다. 일본 재무성 입장을 대변하는 가와이 마사히로(河合正弘)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DBI) 소장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엔화 값이 120엔 선까지 떨어진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DBI의 최대 지분을 쥐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한국과 중국 등이 비상이다. 12일 블룸버그는 “일본의 이웃 나라뿐 아니라 호주와 뉴질랜드, 심지어 스위스의 통화·재정정책 담당자들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글로벌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핫머니가 즐겨 사들인 엔화 가치가 추락하는 바람에 호주달러나 스위스프랑으로 몰려들 가능성이 있어서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은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 정부와 기업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면 좋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85년 9월 미국·일본·영국·서독·프랑스가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고 엔화 값을 올리기로 한 합의다. 사공 이사장은 “당시 엔고 충격과 일본의 대응이 한국 등 주변국에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와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대장성(현 재무성) 장관은 플라자합의로 엔화 가치가 10~15% 정도 오를 것으로 봤다. 하지만 6개월 정도 만에 엔화 값은 50% 가까이 치솟았다.

 『금융투기의 역사』 지은이인 에드워드 챈슬러는 “예상을 뛰어넘은 엔고 현상에 일본 정부와 기업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며 “그들은 서둘러 대응책을 내놓았는데 그 대책들이 잃어버린 20년의 방아쇠 구실을 했다”고 말했다.

 그때 일본 최대 성장 엔진인 수출의 경쟁력이 뚝 떨어졌다. 요즘 한국 등이 겪고 있는 현상이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엔고에 따른 실질임금 상승과 수출가격 상승에 애를 먹었다. 그 바람에 일본 경제마저 침체에 빠질 조짐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서둘러 두 가지 처방을 내놓았다. 우선 기준금리를 내렸다. 당시 BOJ는 85년 9월 이후 1년 정도 기간 안에 기준금리를 8% 선에서 3% 선까지 빠르게 내렸다. 동시에 대장성은 추가경정예산 6조 엔을 긴급 편성해 경기부양에 나섰다.

 일본 기업들은 실질임금 상승과 수출 경쟁력 하락을 막기 위해 생산을 자동화했다. 생산시설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대거 이동시켰다. 보유한 현금 자산 가치가 엔고 때문에 불어나자 미국의 거대 빌딩 등 해외자산 사냥에 나섰다. 그 결과는 거품이었다. 저금리·경기부양은 실물경제를 활성화하기도 했지만 자산거품을 촉발시켰다. 그 후유증이 바로 잃어버린 20년이었다.

 ‘양적완화의 아버지’인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 대학교수는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때 일본 정부가 취한 대책은 정통 경제학계가 추천한 정책들”이라며 “요즘 한국 등이 채택할 가능성이 큰 대책인데 그 후유증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 플라자합의(Plaza Accord)

미국·일본 등 당시 서방 G5의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들이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합의한 외환시장 개입. 그들은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고 엔화 가치를 올리기로 했다. ‘세계 1위인 미국 경제가 침체에 허덕이면 세계 경제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요즘 ‘세계 3위인 일본 경제가 살아나야 세계 경제에 좋다’는 컨센서스와 비슷한 명분이다. 당시 엔화 가치가 예상보다 더 떨어지자 G5는 87년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하기로 했다(루브르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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