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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이라는 전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2호 31면

친절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한 친절함과 남에 대한 친절함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나의 좌우명은 지금까지 항상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자”는 것인데, 이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천하기가 쉽진 않다. 유교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때로 친절함은 나약함으로 비칠 때가 있는 듯하다. 친절은 사회의 주요 덕목이긴 하지만 때로 악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게 어렵다. 누군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수업에 빠지기도 했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못한 적도 있고 회사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반대로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할 때도 있었다. 아마 많은 독자분들도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차츰 내 친구들이나 가족들뿐 아니라 나 자신 역시 돌보는 균형감을 배웠다. 내가 친절함을 베풀고 싶은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나는 항상 제일 마지막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나 자신을 잘 챙기지 않으면 다른 어느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엄마도 항상 내게 “네가 먼저 강해져야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 배터리가 충전이 돼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거다.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친절함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교훈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었다. 부탁을 한번 들어주면 지나칠 정도로 계속해서 부탁을 하거나, 내가 너무 착해 보여서, 혹은 너무 잘 웃어서 나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내가 거절을 할 때는 더욱 직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방법은 내가 자주 쓰지는 않지만 한 번 쓰면 아주 강력하다. 이런 나를 두고 친한 친구는 내가 “대나무처럼 가늘어 보이지만 사실은 강철 같은 성격”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예전엔 내 친절을 악용하려는 다른 사람들의 교묘함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다른 팀원의 일을 대신 해줬는데도 그에 대한 공을 내가 아닌 그 팀원이 가로채는 경우도 있었다. 통·번역 관련한 일이 특히 많았는데, 부탁하는 상대방은 내가 당연히 ‘예스’라고 할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너무도 질이 떨어지는 영어 방송 대본을 다시 고쳐주거나, 누군가의 자녀가 유학을 가고 싶어할 때 무료로 유학 컨설팅을 해주거나, 외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 대신 외국으로 업무 전화를 걸어주는 등등의 일들이다. 이런 경우 내가 거절을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죄송하지만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론 더 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작은 전투에선 져 줄 필요도 있긴 하다. 그런데 내가 친절하다는 게 남들에게 약해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친절함은 때로 전략일 수도 있다. 내가 남에게 친절한 건 그만큼 남도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친절함은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약해 보여서 그걸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나약함이다.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할 때마다 무작정 사탕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선 경계선을 잘 그을 필요가 있다. 평소엔 ‘나이스’한 사람이 “이런 행동은 못 참겠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강력하니까.

 진정한 친절함을 갖기 위해선 끈질긴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이 항상 친절할 수는 없다. 친절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친절함을 나약함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친절함이란 사실 굉장한 심리적 파워다.



수전 리 맥도널드 미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학사를, 하버드대에서 교육심리학 석사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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