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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장성택이 탐한 김치냉장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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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영종
정치부문 차장

#1. 고위 간부로 짜인 북한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2002년 10월 서울을 찾은 장성택 노동당 제1부부장(현 국방위 부위원장)이 눈독을 들인 물건이 있었다. 한 가전제품 생산공장에서 찜해 뒀던 김치냉장고였다. 조상 전래의 김칫독 맛을 그대로 내준단 말에 장성택은 솔깃해하는 분위기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권력실세의 남한 물품에 대한 애착은 의외였다. 김대중 정부는 시찰단 18명 모두에게 김치냉장고를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뒤 판문점을 통한 한국산 김치냉장고 북송작전이 극비리에 진행됐다.

 #2. 같은 해 4월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임동원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광화문 비디오가게에서 영화 ‘쉬리’를 빌렸다. 남한 비밀정보기관 요원과 북한 특수8군단 저격수의 대결을 다룬 작품이다. 임 특보가 급히 쉬리를 찾은 건 특사방북 때 김정일 위원장이 이 영화를 화제로 꺼낸 때문이다. “JSA공동경비구역이란 영화는 좋았는데, 쉬리는 좀 좋지 않더군요”라는 김정일의 말에 임 특보는 당혹스러웠다. 김정일이 줄줄 꿰고 있는 작품을 정작 남한 사람인 임 특보는 본 적이 없어서였다.

 #3.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지난 3월 8일 평양에서 양궁경기를 관람했다. 여자 궁사(弓士)들을 ‘명사수’로 극찬했다. 활을 세심히 살펴본 김정은은 “활 쏘기도 어떤 기재를 이용하는가에 따라 경기 성과가 크게 좌우된다”고 말했다. 노동신문에 실린 당시 사진엔 ‘WIN&WIN’(윈앤윈)이란 상표가 또렷이 드러났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감독 출신인 박경재씨가 설립한 업체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평양 로열패밀리나 노동당·군부 특권층의 남한 문물 사랑은 그칠 줄 모른다. 김정은이 지난달 말 부인 이설주와 평양의 새 상업시설인 해당화관을 방문한 TV 화면에는 남한 화장품 브랜드 ‘라네즈’의 간판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설주가 한국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설화수’ 제품을 쓴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보낸 제주산 감귤·당근 6만6400t 중 상당수는 간부층 선물로 빼돌려졌다는 얘기다.

 주민들에게도 이런 바람은 번지고 있다. 5만3000여 명의 개성공단 북한근로자들에게 초코파이와 함께 ‘막대커피’(커피믹스 제품)가 최고 인기품목이었다는 건 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방증이다. 한때 중국산 초코파이로 교체를 검토했던 북한 측도 근로자들의 볼멘소리에 두 손을 들었다. 공단 재가동을 가장 바라는 건 북측 근로자일지 모른다. 남한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교화소로 보내고, 장마당의 한국 물건을 단속한다지만 효과는 없을 듯하다.

 그나저나 장성택·김경희 부부의 김치냉장고는 10년을 넘겨서도 여전히 김치맛을 잘 내는지 모르겠다. 고모집을 찾은 김정은·이설주 부부가 아삭아삭한 김치에 매료된 건 아닐지, 애프터서비스나 최신형 교체를 고민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 영 종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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