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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파죽지세 이창호, 부활의 꿈 일단 멈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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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창호(왼쪽)가 2013바둑리그 첫판에서 조한승을 꺾었다. 이창호는 30대 기사의 무덤인 바둑리그에서 지난해 5승7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냈지만 올해는 2연승 중이다. [사진 한국기원]

이창호 9단이 12연승 끝에 1패를 당했다. 무대는 8일의 천원전 예선. 상대는 김누리(19) 2단이란 무명기사. 이창호의 연승을 지켜보며 잔잔한 흥분에 젖어 있던 팬들은 의외의 패배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팬들은 제왕 이창호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만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왕좌의 자리에서 한 번 떠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게 승부 세계의 진리다. 이창호 팬들도 지난 몇 년간 거듭 기대가 무너지자 ‘부활’에 대해서는 서서히 입을 닫기 시작했다. 이창호를 편하게 해주자, 그가 바둑을 즐길 수 있도록 그만 놓아주자고 했다. 하지만 이창호의 12연승이 다시 작은 촛불 하나를 켜게 만들었다. 팬들은 행여 꺼질세라 촛불을 두 손으로 감싸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8일의 1패는 더욱 가슴 찡한 아픔을 준다.

 이창호의 12연승이 물론 세계적 강자들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대회인 LG배 예선 4연승과 KB바둑리그 2연승은 프로들도 주목했다. 시드를 받지 못하면 예선에 나가야 한다. 예외는 없다. 한국과 중국의 숱한 젊은 강자들과 악전고투를 벌여야 한다. 이창호는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내며 최연장자로 본선 32강에 합류했다.

 바둑리그는 이창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지난해 이창호는 5승7패(45위)라는 참담한 전적을 기록했다. 주장으로서 면목 없는 성적이었다. 바둑리그는 속기라서 뇌의 순발력이 요구되는데 이창호는 30대 후반이라 힘들다는 분석이 나왔다. 운동 선수들은 만 40세가 넘어서도 활약하는 선수들이 꽤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창호가 40세도 안 되어 ‘나이’에 진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통계적으로 마인드 스포츠인 바둑은 근육을 쓰는 축구나 야구에 비해 조금 빨리 개화하고 조금 빨리 시든다.

 2013 바둑리그에서 이창호는 넷마블에 의해 1지명이 아닌 2지명으로 뽑혔다. 그게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덜어줬을까. 이창호는 티브로드 주장 조한승을 격파하더니 변상일(SK에너지)과의 대결에서도 여유 있게 승리했다. 명백히 살아나는 모습이었다. 바둑리그를 극복하며 자신감을 회복하는 모습이었다.

 한국기원 계단에서 만난 이창호는 살이 전보다 빠졌지만 전보다 건강한 느낌을 줬다. 부인과 아기의 안부를 물었다. 바둑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게 예의일 것 같았다. 12연승을 거둔 이창호는 랭킹도 3단계 올라 10위가 됐다. 지난 6일 중국에서 새로 창설된 메이저 세계대회인 몽백합(夢百合)배는 이창호 9단과 쿵제 9단을 와일드카드로 지명한다고 발표했다. 뭔가 순조롭게 흘러간다 싶었는데 이름도 처음 듣는 김누리에게 일격을 당했다. 역시 부활이란 불가능한 일인가. 팬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젖는다. 12연승 그 자체로 이창호는 희망을 줬다고 믿는다.

 2006년 이후 이창호는 세계 대회에서 10연속 준우승에 머물렀다. 140회 우승한 무적의 이창호였고 한국 바둑의 신화를 만든 이창호였지만 그가 정상권에 멀어진 지는 꽤 됐다. 이창호는 다시 왕좌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창호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건 얼마나 근사한 판타지일 것인가. 바둑 팬들이 ‘이창호’라는 촛불을 소중히 감싸는 이유도 승부 세계의 일반 법칙을 뛰어넘는 그런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너무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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