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생활 속의 메아리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 한해의 「중앙시조」, 「중앙동산」을 회고합니다. 매일같이 정리자의 「데스크」엔 독자들의 따스한 입김이 수북히 쌓입니다. 적은 지면에 그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지 못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몇 가지 인상 담을 여기 소개합니다.

<중앙시조>
「중앙시조」는 독자와 더불어 생각을 가꾸고 글을 다듬는 자리. 지난1년간에 1만6천여 장이 투고돼 그중 1천여 편을 소개했다. 해를 보내면서「중앙시조」의 면모는 한결 철이 들고 어른스러워지고 혹은 교양미를 풍겨 윤택해진 독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신춘중앙문예」 시조부의 응모는 그 동안 「중앙시조」난을 통해 낯익은 얼굴들이 단연 압도적이다.
개중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싱싱한 시조 인이 돼있다.
그러나 「중앙시조」의 많은 투고자들은 「느낌」을 미처 정리 못하고 있다.
혹은 「느낌」도 없이 억지로 글을 짓는다.
구지레한 푸념이나 비분감개가 곧 시 인줄 착각한다. 『빈하다 개절말고 천하다 실의마라. 입신양명하는 것이 당귀에만 있다더냐. 아마도 천신만고를 극복한자 장부라』- 여기엔 생활도 감동도 없다. 비록 설익은 구상이요, 서투른 글 솜씨라 하더라도 거기 생활 속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만 「생활시조」의 의의가 있다.
「함박눈」이라 제목을 붙인 어느 독자는 『갈매기 떼지어 나는 포구처럼, 함박눈 송이송이 삼라만상 물들이니, 과목된 나무가지도 백화꽃이 피누나』- 시조의 격식을 갖췄지만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 되고 말았다. 또 어떤 독자는 아예 시조의 정형을 무시해버린다. 『오들오들 옹크린 소녀. 징검징검 발을 디디고. 호호 후후 손을 비빈다』
-이건 시조가 아니다. 소재도 없고 얘기도 없다.
시조는 평시조· 엇시조·사실시조 등으로 대별하지만 「중앙시조」 난에서는 제한된 지면 사정과 또 시조의 기본 율을 공부하는 뜻에서 평시조만 다룬다. 총자수 45자 내외. 1·2연은 344(3) 4, 3연은 3543으로 글귀를 배열한다. 그 중에도 셋째 연의 첫 귀가 3자, 둘째 귀가 5자 이상 되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중앙시조」가 『독자를 위해 존재한다』 고 자부하는 이유는 모든 독자가 함께 일상생활의 느낌의 단편들을 우리의 호흡에 맞는 글로 엮어보는데 있다. 굳이 기성작가의 매끄러운 글투가 아니라도, 서로 공부하고 가다듬어보는 기회로써 그 의의는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금풍매월조의 구투를 원치 않는다.
오늘에 살고 있는 청순한 감각. 이것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것으로 족하다.
독자들 중에는 무수한 이름과 주소를 갖고 투고하는 이가 있다. 이런「직업적인 투고」는 서로 공부하는 이의 옳은 태도일까?

<반짝이는 동심의 빛|하루 30여통 들어와 5면 게재|가슴 섬뜩한 사회상도="중앙동산">
아이들의 마음은 빛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다. 「중앙동산」은 시냇물처럼 맑고 깨끗한 반짝임들을 갖고 있다. 하루에도 이런 「반짝임」은 평균30여 통의 엽서로 쏟아져 온다. 지난1년 동안 「중앙동산」에 실린 「동심의 메아리」는 1천8백여 편에 달한다.
중앙일보는 하루 평균5편씩의 작품을 「중앙동산」에 심고있다. 지방판마다 되도록이면 그 고장어린이의 노래를 등장시킨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꽃피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하루 한편씩 싣기에는 「중앙동산」이 너무 비좁기 때문이다.
『아빠는 「파랑새」를 피우시고
엄마는 「동갈래」를 태우시고
오빠는 「아리랑」을 물고 계시고….』 (경북상주·상영 초등학교2년· 박순옥)어린이들의 눈에서 때때로 이런 섬광을 발견할 때 선자는 섬뜩해진다. 실로 아이들의 눈은 빛이다. 지난 6월에는 경북 예천 예천 초등학교 어린이가 「후보자 선생」님이라는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입후보 선생님. 아버지 어머니에게 술 주지 마세요. 오늘도 술 마시고 아빠 엄마 싸우셨어요. 우리들은 무서워요.』 눈물겨운 현실의 단면이다.
우리는 백 마디의 수다스러움보다도 이 한 절의 노래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 「중앙동산」은 「미니· 세태」이기도하다. 『무서운 아이들』 만은 아니다.
『삐악 삐악 병아리
엄마 없는 병아리
우리집 병아리는
기계병아리.』
(부산 문현 초등학교 4년)「전정미」어린이는 『모이를 주려면 졸졸졸 따라다녀요. 나를 엄마 닭인줄 아나봐요』라고 깜찍한 끝맺음을 하고 있다. 「깜찍한」것은 병아리를 통한 「현대판 고아」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다. 오늘의 어머니들은 전양의 노래처럼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을「기계병아리」처럼 만들고 있는가. 완구처럼 장식된 어린이 「인류중학」을 위한 기능공 「어린이」 부모의 관심 밖으로 미끄러져 나간 어린이….
동심이 대체로 어두운 빛을 갖는 것은 우리를 더 한층 우울하게 만든다. 『꿈속에서는 별을 잡았는데, 지금은 왜 별이 없나요.』 (경남울산·울산 초등학교 2의3· 전지옥) 하는 투의 「우울함」을 담은 엽서는 쉽게 손에 잡힌다. 어린아이들은 가난한 타령, 비(우)가 쌀이라는 가뭄 타령 등으로 주름이 진 모습을 생각하면 세상은 한결 더 침울한 기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