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탄생 40년만의 스크린 데뷔! '스파이더 맨'

중앙일보

입력

어린 시절, 스파이더 맨이라는 캐릭터에 매혹당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인간의 몸으로, 거미의 능력을 지닌 그는 중력의 법칙이나 신체적 한계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다. 건물에서 건물로 훌쩍 뛰어다니고 손목에선 거미줄이 발사된다. 유년시절, 스파이더 맨의 이런 초인적 능력을 흉내내다가 어딘가 다친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스파이더 맨의 매력이라면 이 영웅은 슈퍼맨처럼 너무 우쭐대지 않고, 배트맨처럼 어둡고 우수에 차있는 영웅이 아니라는 것. 대신,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도시의 뒷골목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건물 모서리를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스파이더 맨의 일상이다.

스파이더 맨이라는 캐릭터는 1960년대부터 등장했다.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그리고 TV 스크린 등으로 바쁘게 돌아다닌 것. 장편 극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 '스파이더 맨'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면, 연출자 탓이다. 감독은 '이블데드' 시리즈와 '심플 플랜' 등을 만든 샘 레이미. 공포와 스릴러 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연출자인데 최근 들어 다소 부진한 모습도 보였다. '기프트' 등의 최근작은 장르영화로선 무난하지만 샘 레이미의 이름값을 기대했던 이라면 실망할 구석도 있었기 때문. '이블 데드' 시리즈 등 현란하기 그지없는 테크닉을 선보였던 초기작들이 워낙 컬트팬들에게 칭송받았기 때문이다. 신작 '스파이더 맨'에서 샘 레이미는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만들되, 자신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작품에 새길수 있는 연출자임을 입증한다.

내성적인 학생인 피터 파커는 어느날 견학차 방문한 연구실에서 유전자가 조작된 슈퍼 거미에 물린다. 그는 며칠 뒤 손에서 거미줄이 튀어나오고 벽에 기어오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피터는 평소 짝사랑하던 메리 제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를 구입하기로 마음먹는다. 격투기 대회에 나가서 상금을 타겠다는 것. 그런데 같은 날 벤 아저씨의 죽음을 경험하고, 피터는 자신의 힘을 악을 무찌르는데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피터의 친구 해리의 부친인 노만은 실험 도중 가스에 중독되어 악의 화신 '그린 고블린'으로 변한다.

'스파이더 맨'은 단순한 볼거리에 치중하는 대신,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뒤섞는다. 스파이더 맨의 탄생에서 그가 어떻게 영웅이 되고자 결심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초인간적 능력을 받아들이게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린 학생에 불과한 피터는 처음엔 장난삼아 능력을 사용하지만 곧 사회정화의 차원에서 힘을 쓰기로 작정한다. 영화는 스파이더 맨이라는 캐릭터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는 엄청난 괴력을 지닌 동시에,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길 꺼린다. 캐릭터를 단순화의 늪에서 구원한 것은 시나리오 작가 데이빗 코엡의 공로다. (그는 <미션 임파서블> 등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만화적 발상과 SF적 상상력, 그리고 저주받은 영웅의 등장이라는 것은 샘 레이미 감독의 전작 '다크맨'을 연상케하는 부분도 있다.

스파이더 맨의 적수인 그린 고블린이라는 캐릭터도 근사하다. 이 캐릭터는 윌렘 데포가 연기하고 있는데 선과 악, 그리고 사랑과 증오 등의 상반되는 감정을 한꺼번에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인물로 분한다. 거울을 보며 일인이역을 연기하는 대목은 소름끼칠 지경. 우리가 이미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통해 볼수 있었던 극한 정신적 분열양상을 상기시킨다. 노만이 어쩔수 없이 '그린 고블린' 가면에게 지배당하는 장면들은 매력적이다.

'스파이더 맨'은 블록버스터 전략에 충실하다. CG기술이 화려하고, 영웅은 멋지게 포장되어 있으며 애틋한 로맨스까지 가세한다. 타임스퀘어와 퀸즈보로 다리에서 벌어지는 스파이더맨과 그린 고블린의 혈투는 영화의 절정부다. 그런데 이외에도 '스파이더 맨'은 솔솔한 재미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 스파이더 맨과 그린 고블린은 적인 동시에 한 가족이다. 피터와 노만이라는 인물이기도 한 그들은 일상에선 아들과 아버지 같은 존재로 지낸다. 그렇지만 가면을 쓴뒤엔 사태가 달라진다. 그들은 영웅, 그리고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반영웅이다. 샘 레이미 감독은 이렇듯 단순한 블록버스터인 듯하면서도 장르적인 관습을 교묘하게 비틀고 어딘가 컬트적인 기운이 배어있는 영화로 '스파이더 맨'을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오락영화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