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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패자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조국의 민주주의는 이로써…』새벽녘,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야전양의 초토 위에서 「코뮤니케」를 발표하는 패전사령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고 「종군기자」들은 보도하고 있다. 실로「전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애조와 탄식과 허탈이 남아 있다. 엉엉 우는 「병사」도 있었다. 9일째의 신경전은 우리의 가슴도 답답하게 누르고 있었다. 승부의 긴장이 아니라 이 「무공기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조마조마한 기대였다. 아무 것도 기대할 것 없이 여·야의 대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에 의해서 끝이 났다.
지금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이고」가 없다. 모두 패자들뿐이다. 여도, 야도 모두 민주주의의 패자들이다. 감히 이 순간에 누가 국민에게 깃발을 흔들라고 하겠는가. 아무도 기쁨의 함성을 울리며 민주주의를 구가할 사람은 없다.
의사당에 가설무대를 설치하는 기습사회는 한국 초유의 고안은 아니다. 일본에서 이미 「마스터」한 사례가 있다. 언젠가는 2층에서 신문지 크기 만한 창문을 열고 사회 봉을 똑딱, 똑딱, 똑딱 두드린「코미디」풍의 기습사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전쟁직후의 혼란 속에서 있었던 일본의 악몽들이다. 국교이후 하필이면 일본의 그 낡은 악몽첩을 수입한 것은 뒷맛이 더 쓰디쓰다.
세상에 조용한 의회로는 중남미 쪽의 국회들을 들 수 있다. 도대체 떠들썩할 이유가 없다. 민선의회는 있지만 입법권은 집권자가 홀로 행사하는 식이다. 그러나 「도미니카」나 「베네수엘라」같은 나라는 평균 2년에 한차례씩 개헌을 하고있는 사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무려20차례나 그런 식으로 개헌을 거듭했다. 이것 이상의 소란한 「정적」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왜 논란을 꺼리는가. 국회는「허니문」을 즐기는 당선축하연회장은 아니지 않는가. 선거의 의미는 토론을 전제로 하고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선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관철될 때까지 국민과 함께 싸울 것이다.』
「패전」 의장은 스스로 부인한다. 국민은 『국민과 함께 싸울 것이다』는 그것에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에도 비극은 있다. 이제 국민의 기대는 여도 야도 아닌 「이성」에 걸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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