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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무상 비운의 「송구영신」파리의 하늘밑을 안식처로 딸 「사리」재롱에 시름 잊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파리」의 지붕 밑은 동경의 지붕 밑보다는 조용하나 쓸쓸한가보다. 영화의 정상에서 청춘을 불태우던 때도 이제는 옛말, 전「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의 제3부인 「데위」는 「파리」의 한「아파트」에서 고독을 씹고있다.
그중 하나가 「포슈」로, 여기서 약간 들어간 가로변에 우뚝 솟은 「아파트」가 오늘의 「데위」부인의 안식처라면 안식처, 식구라야 귀염둥이 딸「카르치카·사리」양 보모 겸 가정부(가정부)인 T씨, 그리고 잔심부름을 하는 백인소녀 하나로 겨우 넷. 『참으로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들이지요.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고요』 「아파트」관리인의 입주자로서의 「데위」에 대한 평이다. 「데위」가 살고 있는 지역은 「파리」에서도 첫째 둘째를 꼽는 고급 주민가이기는 하나 그녀의「아파트」는 그렇게 호화만은 아닌 듯, 방수나 가구 등을 살펴보아도 그저 수수한 중산계급이 드는 집으로 보면 마땅할 것 같다.
『일본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란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일본인이예요. 그러나 「사리」를 낳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에 돌아올 때부터 10개월간, 갖가지 몹쓸 중상이 나를 괴롭혔지요, 하루도 마음 편할 때가 없었으니까요.』 이런 말을 남기고 지난 9월 동경을 떠난 그녀였다. 9월24일 땅거미가 들 무렵 「뉴요크」의 낯선 공항에 내린 그녀를 맞은 사람이라고는 「신디·아담스」여사뿐이었다. 「아담스」여사는 「수카르노」대통령의 자서전을 쓴 바 있어 「데위」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셈. 염량세태였다. 미국에 와 있는 하고많은 일본인이나 「인도네시아」인 중에서 그녀에게 출영의 손길을 미치는 이는 없었다. 다행히도 일본에서와는 달라 「뉴요크」에서 「데위」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것은 없었다. 신문의 「고시프」난 만이 「카바레」나 극장에 모습을 보인 그녀를 잊지 않았을 뿐, 덕분에 2주간의 「뉴요크」체재는 잠시나마 『 「뉴요크」의 휴일』의 기쁨을 비운의 이 여인에게 안겨주었다.
한가지 「데위」의 신경을 크게 건드린 것은 『「데위」-「수카르노」이혼하다』라는「안타라」 통신의 보도, 지난 10월18일 「뉴요크」에서 「파리」로 왔다. 여행목적은 『「패션」이나 실내장식』을 공부하기 위해서라고. 「데위」일가는 일본에서 부친 하물이 도착하기 전까지인 1개월 반 동안 「파리」에서 가장 값비싼 「프라자· 아테네· 호텔」 에 짐을 풀었다. 이 「호텔」의 하루숙박료는 1백80 「프랑」, 「파리」의 이 이방인에게 「프랑스」신문들은 그렇게 떠들어대지는 않았으나 「뉴스」권밖에 놓아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최근「파리」의 한 석간지는 『전「인도네시아」 대통령 부인「데위」가 「인도네시아」고유의 옷차림새로 여자친구 한사람과 「테아호르·몽파르나스」에 나타났다. 부인은 친구의 통역으로 「브라크· 코메디」(희극이름)의 대사를 영어로 들었다. 막간에는…운운』 하고 오랜만에 사진과 함께 「고시프」난에 그녀를 소개했다. 극장 안의 휴게실 한쪽 구석에서「브랜디」를 마시는 모습도 사진으로 보도됐다. 이것은 「데위」의 시대는 지나갔으나 아직도 『밤의 사교계의 꽃』으로서의 그녀의 후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데위」의 체불 「비자」기한은 3개월로 되어 있으나 어쩌면 「파리」에 영주할지도 모른다. 낡은 「아파트」의 벽에는 지금「페인트」칠이 한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부군 「수카르노」와는 서로 음신이 끊어진 듯. 다만 「인도네시아」에 잇는 일본여인들로부터 간접적으로 한 때의 남태평양의 이 풍운아의 소식을 듣고있다는 소식.
「사리」양의 재롱에 어제의 괴로움을 잊고는 있으나 언제까지 관극이나 사냥으로 소일할지는 의문. 정들어 살던 「야소」궁전도 「인도네시아」 군정에 의해 접수되었고 보면 이제 「데위」가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듯. 시간은 그녀로 하여금 제3의 인생을 설계토록 재촉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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