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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비즈니스맨은 지금 영어와 전쟁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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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독일 알리안츠 애셋 매니지먼트(AAM)社의 아침 회의에는 뭔가 색다른 점이 있다. 분석가들은 U자형 탁자에 둘러앉아 그날 매수·매도해야 할 종목에 관해 토의한다. 그런데 분석가 중 반만 독일인이고, 나머지는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러시아 출신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다. 알리안츠 그룹이 1998년 뮌헨에 AAM을 세울 때, 이곳의 모든 업무를 영어로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AAM의 다니엘라 스파메니 인사부장은 새 직원을 채용할 때 독일인 지원자라도 영어로 면접을 본다.

이제 세상은 비즈니스 영어의 신세계로 바뀌었다. 대기업으로부터 자동차부품 하청공장까지, 영어는 더 이상 교양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필수 요소다. 과거 기업에서 영어가 필요했던 사람은 해외영업부 직원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사담당자부터 우편실 직원까지 모두가 어려운 새 언어를 배워야 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기업은 번창하지만 모국어에만 집착하는 나라는 뒤떨어질 것이다.

직원 개인으로서는 영어 능력이 승진과 연봉에 영향을 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언어 제국주의’나 영어와 함께 들어오는 미국식 기업문화를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어 자체가 사용자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재플리시(일본식 영어)·싱글리시(싱가포르식 영어) 등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어의 기본은 배워야 한다. 일본 해외기업협회의 요코다테 히사노리(橫館久宜)는 “영어는 기업의 인프라다.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쓸 줄 모르면 기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쓰이는 영어’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직장인에게는 수험영어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영어가 요구되고 있다. 많은 일본 기업이 직원들의 영어능력 테스트를 위해 채택하고 있는 토익은 수험자수가 한해 1백만명을 넘는다. 5년만에 배로 늘어난 수치다. IBM 같은 외국기업과 히타치 같은 일본계 다국적기업은 인사고과에 영어 실력을 반영한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외국기업·다국적기업 중 10%가 이런 인사정책을 펴고 있으며, 33%가 앞으로 이를 도입하려 한다.

이것은 대기업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인터넷의 보급과 국제적인 기업 인수 덕택에 일반 중소기업에서도 영어화가 진행되고 있다. 영어교육 전문회사 벌리츠社 일본지사의 마쓰모토 요시나가(松本吉永)는 “자신은 국내 영업 담당이라고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외국인 상사로부터 사내 문서를 영어로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허겁지겁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경영이라는 큰 파도를 맞아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도 해외거래처와 비즈니스를 하려면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영어화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영어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고 있다. AAM의 티나 윌킨슨 상품개발부장은 “일부 유럽 기업은 사내 공용어를 영어로 바꿨다.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한 그것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전에 근무하던 파리의 한 회사는 영국의 금융기관을 인수한 후에도 계속 프랑스어를 사내 공용어로 채택했다. 덕택에 “마지막까지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윌킨슨은 말했다(게다가 이 프랑스 기업은 영국인 직원들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도록 강요했다). AAM의 마커스 리스 최고경영자는 터키·캐나다·러시아 출신의 분석가도 채용한다. 그는 “독일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세계의 우수한 인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영어는 국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테네시 大의 우셔 헤일리 교수는 인도가 전세계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의 80%를 수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도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5천만명이 있다. 덕택에 인도는 세계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중국에도 기술자들이 많지만 정작 필요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등학교 영어수업 시간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의 김현수(金鉉洙·27)씨 경우에 동정을 금치 못할 것이다. 프랑스 르노社가 한국의 삼성자동차를 인수했을 때, 새 경영진은 모든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고 사내문서도 영어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본사의 사무직으로 토익 성적이 7백점 이하인 사람들은 ‘최우선’으로 영어를 배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현재 金씨의 생활은 영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는 오전 6시에 일어나 라디오에서 영어강의를 듣는다.

그는 이것을 녹음해 출퇴근길에서도 듣는다. 직장에서는 외국인 상사에게 제출하기 위해 몇시간씩 공들여 영어 보고서를 작성한다. 회의에서는 영어로 의견을 주장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 업무시간 이후에도 1주일에 두번은 90분짜리 집중 영어코스에 참가해야 한다(비용은 회사 부담). 그는 “늦게까지 남아 영어 공부를 하고 있으면 때때로 비참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제 시대다. 영어를 마스터하지 않고서는 성공은커녕 살아남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영어가 기업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이것을 배워야 하는 직원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거에는 기업의 국제영업 관련부서 직원들만 영어를 알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부서에 있어도 영어가 필요하게 됐다. 독일 IG메탈의 노조 간부 다그마르 오푸첸스키는 IT 분야부터 생명공학까지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했다.

영어는 고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현수씨가 근무하는 르노삼성자동차에서 토익 8백점 이상을 받는 직원들은 업무평가에서 가산점을 얻어 승진과 승급에서 유리해진다.
그래도 회사가 영어학습을 지원해주는 金씨의 경우는 나은 편이다. 전혀 지원이 없는 회사도 많기 때문이다. 요코다테는 일본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근무시간에 사내 영어회화 교실을 열거나 영어학원에 다니게 하는 경우는 불황 등의 이유로 많이 줄었다. 지금은 직원 각자가 알아서 영어를 배워야 하는 분위기다.”

GE 메디컬 시스템스 상하이(上海)지사에서 근무하는 중국인 탕리는 회사가 지원하는 온라인 영어강좌를 근무시간에 청강하지만, 그외에도 주당 약 1백달러의 개인레슨을 자비로 하고 있다(그녀의 한달 봉급은 약 7백50달러다). 그녀는 돈이 많이 들지만 승진하려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영어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어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유럽 사람들은 이처럼 열성적이지 않다. 다임러-벤츠社는 1998년 크라이슬러社를 인수한 후 영어를 사내 공용어로 지정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여기에 반발해 직원들이 독일어로 번역된 문서를 받고 회의에서 독일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지난해 독일 남서부 수출공업단지의 IG메탈 노조는 전종업원을 대상으로 근무시간 중의 능력개발 교육 및 최장 3년의 복직보장 교육휴가제를 실시하라며 파업을 벌였다. IG메탈 노조의 오푸첸스키는 “노조와 사용자가 이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노동자들이 영어 공부의 필요를 느끼는 것이 좋다. 물론 의무적인 영어수업은 근무시간에만 실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영어의 ‘열등반’ 국가도 있다. 일본은 영어교육에 지출하는 돈과 시간이 엄청나지만, 토플 평균점수는 여전히 낮은 수준으로 아시아 23개국 중 22위에 불과하다(2000∼2001년 통계. 23위는 북한). 학교의 영어교육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일본 학교에서는 아직도 영어를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시험과목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문화의 문제도 있다. 벌리츠 일본지사의 마쓰모토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의견을 너무 내세우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진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유학을 갖다 온 사람은 늘어나고 있지만 외국인과 영어로 논쟁하거나, ‘내 생각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언어는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벌리츠社 본사(뉴저지州 프린스턴 소재) 사업개발부의 아니타 컴로즈는 “단순히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보다는, 마음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컴로즈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늘고 있지만 그만큼 마찰의 요인도 증가하고 있다. 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벌리츠社는 협상태도·경영정보·프레젠테이션에 관한 문화적 차이를 주제로 강좌를 개설했다.

수강자는 매년 15%씩 늘어난다. 킹스 칼리지(런던 소재) 언어센터의 토니 소언은 영어가 서구의 기업문와와 함께 전파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지쓰 트랜색션 솔루션스社(텍사스州 댈러스 소재)의 낸시 대니얼스 업무최고책임자(COO)도 여기에 동의했다. 후지쓰 계열의 이 회사에서는 회의를 열지 않고 품의서를 돌려 결재하는 전형적인 일본 기업형 방식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합의를 구하지 않고 직접 솔선수범하는 신세대 경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대니얼스는 말했다.

언어는 기존 질서를 뒤엎을 수 있다. 벌리츠社의 컴로즈는 사무실에서 미국식으로 성은 빼고 이름만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계적인 기업문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전세계의 기업이 미국 기업처럼 격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단도직입적으로 전달하게 될 것이다. AAM社의 윌킨스는 기업에서 직원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게 되면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는 문화는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윌킨스는 “영어를 사용하면 문제의 본질에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하게 된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전세계의 영어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수년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시련을 겪은 나이 많은 직원들이 이제는 기업이 영어를 강요하는 바람에 또다시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의 뉴브리지 캐피털社에 경영권이 넘어간 제일은행에서는 새로운 인사고과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자 지난해 노동조합이 기존 한국의 전통을 무시하는 ‘문화적 제국주의’라며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회사측은 영어의 공용어화 방침을 철회하고 미국인 간부들에게 전속 통·번역자를 붙여줬다.

실제로 영어로 업무를 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고베(神戶)大 경제경영 연구소의 요시하라 히데키(吉原英樹)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막상 영어로 비즈니스를 하려고 하면 장애가 많다. 영어를 사용하면 일본어를 쓸 때보다 전달하는 정보량이 줄어든다.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고 수준이 저하된다.” 그는 일본 기업이 과거에도 영어만 사용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래도 그는 “e메일과 컴퓨터가 사무실로부터 일본식의 ‘암묵적인 양해’를 몰아내기 시작한 것처럼 영어를 쓰는 기업이 늘어나면 일본식 경영도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화적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영어의 미래’(The Future of English?)의 저자 데이비드 그래덜은 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중국의 한 제철업체를 주목했다. 그래덜은 “회사 어학교육 센터의 교사가 거의 벨기에 사람들뿐이었다. 자국의 문화를 강요하는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경원시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언어학의 법칙 한가지가 작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He always catch no ball one”이라는 말은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을 하려면 보통 영어사전이 아니라 ‘싱글리시’ 사전이 필요하다. 싱가포르에서 영어는 말레이족·타밀족·중국인이 사용하는 공용어다. 그러나 그것은 정통 영어가 아니라 독자적인 어휘나 발음을 가진 싱글리시다. 이같은 영어의 돌연변이에 놀란 싱가포르 당국은 ‘올바른 영어 쓰기’ 캠페인을 펼치고 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같다.

영국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영어는 언어의 스펀지”라고 말했다. 영어는 이미 3백50가지 언어에서 단어를 빌려왔으며 지금도 매일 타언어의 단어가 영어에 추가되고 있다. 비즈니스 영어가 세계로 보급되면서 새로운 영어 방언도 증가일로에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것을 ‘세계 영어’나 ‘국제 영어’라고도 부른다.

'국제 영어’를 연구하는 제니퍼 젠킨스는 영어의 동사변화가 단순해지고 까다로운 정관사·부정관사가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한편 영어의 발음도 변한다. 젠킨스는 “예를 들어 ‘Think’가 ‘sink’나 ‘tink’로 발음된다. 원어민에게는 이런 발음이 틀린 것이지만 국제 영어에서는 이런 변화가 수없이 많다”고 말했다. 여직원을 ‘OL’(office lady)이라고 부르거나 구조조정(restructuring)을 ‘리스토라’라고 부르는 일본식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주눅들 필요는 없다. 언젠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어 단어가 아시아 전역의 국제 영어로 쓰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잘 하는 것이다. 영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편리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마찬지다. 미국은 새로운 글로벌 비즈니스 모델의 중심지이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미국 MBA 과정에서도 세계의 다양한 사례를 연구한다. 조지타운大 MBA 과정의 부책임자 마릴린 모건은 “수십년 동안 미국의 경영학 교육은 미국을 위한 것이었다. 지난 20년간 새로운 시장들이 생기고 경제가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이제 미국의 사업모델에만 기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제부터 조지타운大가 추구하는 목표는 “다양성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들 사이에선 여름방학 때 배낭을 메고 서구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배낭여행을 통해 언어뿐 아니라 문화를 배우려는 것도 같은 목적이다. 같은 이유로 유럽의 기업들도 영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언어학자 크리스털은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 언어를 배우는 것이 커다란 추세를 이루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명백한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사원식당에서 모두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글로벌 시장에서는 영어를 전혀 쓰지 않는 나라뿐만 아니라 영어만 사용하는 나라도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 모국어를 잘 한다면 학교에서 배운 영어의 기억이 가물가물해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싸움에서 이미 절반은 승리했다고 생각하자. 다시 교과서를 붙잡고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면 된다.

Dana Lewi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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