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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년…흘러간 「뉴스」의 주인공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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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은퇴한 노기남 대주교>
『올해는 내 생애를 통해 가장 큰 변화의 해였죠.』신탄진 담배 한가치를 피워 물며 노기남 대주교는 요즘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지난 3월 은퇴직후 보다 이마의 주름이 더 깊고 많아 졌다는 측근자의 말.
안양에서 10리쯤 떨어진 몰압산 기슭에 나환자촌 성 「나자로」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은퇴한 노주교 양성환자 80명, 음성환자 2백10명 증 3백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3평반 남짓한 거실은 나무 침대하나가 방을 반쯤 차지하고 타다 남은 양초가 놓인 책상이 방 전체를 메운 느낌이었다.
『지난달에는 충북 청주교구에 다녀왔죠. 그곳에서 좀 와 봐달라기에….』지난 8일까지만 해도 종교인 협회 회장직을 맡아있었기 때문에 서울 출입이 잦았다면서 「가톨릭」재단 이사장의 명의도 아직 노주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채 변경이 안되어 사무 연락 때문에 바깥 출입도 심심찮게 했다고. 오는 20일로 주교된지 만 25년이 되는 노주교는 『「가톨릭」에선 그 날을 은경축이라 해서 축하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모습에는 맑게 늙어 가는 담담한 적료감이 감돌았다. 『전기도 없고 수돗물도 안 들어 와서 이야기를 했더니 한전 직원이 보고 갔는데 어떻게 될 것』이라면서 웃었지만, 응접실에 피워놓은 「프로판·개스」난로의 연료도 동이 났다고 일하는 사람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다가온 성탄절 지낼 일도 걱정이라 했다. 『할아버지라면서 따르는 꼬마들을 밤이면 꼭 찾아가서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하루의 마지막 일과라는 노주교는 성직 생활 37년 동안 몸에 젖은 일과에 70세가 다 된(올해 69세) 요즘에도 하루도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아침 5시30분에 눈을 뜨면 2시간 동안 기도와 미사를 드린다』면서 주교들이 가질 수 있는 「소성당」에 안내했다. 거실과 바로 맡붙은 소 성당엔 「예수」의 일생을 수놓은 「메그·15단」병풍과 「수난성로 14체」가 벽을 두르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니 환자들이 몹시 추위를 타요.』 그들에 대한 걱정도 태산같다면서 그는 지난 봄보다 가을, 가을보다 겨울이 될수록 찾는 사람들이 적어졌다고 소리없이 웃었다. 종종 잡지사에서 수필을 썼다는 노주교는 『날씨가 아무리 차도 몰압산 동산에 오후 시간을 다 보낸다』고 했다. 아예 바깥 세상의 일에는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았지만 그는 『천주께서 「온경축」의 선물로 내게서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 것』이라고 전부가 의치인 휜 이를 드러내며 조용히 웃었다. 『몸은 건강해요』건강하다면서 노 주교는 명년에 「로마」에서 「한국 순교자 시복식」이 올려지면 그곳에나 다녀올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11일부터 성탄 특별 「미사」나 드리면서 여기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겠다』는 노주교는 『「로마」에서 부르련 항상 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후배들을 위해서 아니면 자기를 궁금히 여기는 사람을 위해 자서전을 쓰고 싶어도, 『지난 기억들을 되새길 수 없어 못 쓰겠다』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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