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 북한, 왜 불가침에만 집착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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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미 불가침 협정을 요구하는 저의가 분명치 않다. 역사는 불가침협정이 전쟁을 방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데도 불가침협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교사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4일 이른 아침 모스크바에서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조인한 독.소 불가침조약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그 이듬해 12월 18일 "독일군은 영국과의 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소련을 분쇄할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는 훈령 21호를 결재했다.

그리고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소련과의 동부전선에 3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하고 41년 6월 22일 소련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은 전쟁을 방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전쟁준비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주한미군 철수 노린다면 착각

그렇다면 북한이 불가침조약을 원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미.북 간에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 명분이 소멸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불가침협정은 북한이 침략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입장에서 보면 대미 불가침협정은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압박 수단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일 북한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에 불가침협정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만일 북.미 간에 불가침협정이 조인된다 하더라도 북한의 대남 자세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우리의 안보태세는 변화보다 연속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미군의 주둔도 마찬가지다.

둘째로는 북한이 말로는 불가침 운운 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북한 체제의 안전문제다. 이 문제는 남과 북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고 상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만일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한 것이 아니고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은 '일본식 사회주의'로 전환했다면 우리나라의 체제가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북한 측 표현을 빌린다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적대적 정책을 버리고 하루 속히 북한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가정이 맞는다면 북한은 체제의 안전 문제에 있어서도 또 다시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체제는 미국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성격의 존재가 아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 가운데는 북한의 체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실제로 북한의 체제 변화를 유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공산주의 붕괴는 내부 모순탓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원인은 공산주의 체제의 내부 모순에 있었다. 미국이 조종한 것이 아니다. 만일 북한 권력층이 북한 체제의 운명을 미국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힘을 너무 과대하게 평가한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아무리 적대적인 자세로 나온다고 해도 북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북한이 정말로 살기 좋은 사회라고 한다면 북한은 체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북한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 통치자들은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과의 불가침협정은 북한의 현존하는 국경선을 인정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다.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북한 통치자들은 미국에 압력을 가해 자신들의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하지 말고 실제로 북한 체제의 내부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체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찾기 바란다. 지금 북한에 필요한 것은 불가침협정이 아니라 개혁과 개방이다. 명심하기 바란다.
김경원 " ><사회과학원 원장,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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