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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통치행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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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역사 속에서 통치행위와 국민참여는 반비례 관계였다. 통치행위가 극적으로 부정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다. 절대왕정의 절정기에서 루이14세는 "짐이 곧 국가"라고 말했다.

그의 부국강병.해외식민 정책과 베르사유의 화려한 궁정문화로 부르봉 왕조는 빛나는 군림의 시대를 꽃피웠다. 프랑스 민중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희생자는 루이14세의 다음다음 왕인 루이16세였다.

부르봉 왕가의 통치권 만능사상은 '불온한' 계몽사상이 시민계급 속으로 급속히 침투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계몽사상은 왕권이나 신권, 전통 같은 제도적 결박으로부터 인간이성의 해방을 선언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41년 전에 쓰여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3권분립을 천명해 정치적 계몽사상의 교과서가 됐다.

3권분립이 제도화된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의 권력행사는 헌법과 실정법의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그렇다 해도 전쟁.정변, 민족주의 열정 같은 법외적 이슈가 나라를 비상사태에 빠뜨리거나, 3권의 충돌로 권력공백이 발생할 때 등을 감안해 현대의 대통령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통치행위를 인정받고 있다.

대통령의 비상조치권.사면권.거부권, 외국과의 국교수립 협상 같은 고도의 국정행위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게 보통이다.

문제는 권력자가 통치행위의 감미로운 유혹에 굴복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다. 전제군주 시대의 신성불가침한 통치행위 유전자는 현대의 대통령들의 피에도 흐른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기업 오너들로부터 각각 5천여억원을 거둬들인 게 그 경우다. 그들은 이 돈을 통치자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의 분노는 사법부로 하여금 통치자금에 유죄판결을 내리게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 집권과정도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 통치행위라며 면죄부를 주었으나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소급입법을 제정해 다시 벌을 준 케이스다. YS의 무리한 소급입법을 눈감아 준 것도 국민의 분노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비밀자금 지원을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 통치권자의 결단으로,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사익을 꾀한 전직 대통령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일 게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고 안되고를 국민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오판이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 <chuny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