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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진상 대 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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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규연
논설위원

경기도 고양시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지공무원 Q씨. 집전화·휴대전화 벨소리를 항상 진동모드로 해두는 습관이 굳어졌다. 악성 항의 전화에 대한 자구책이다. 멧돼지같이 밀고들어오는 민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벨소리 공포가 줄어든 대신 번호 공포가 생겼다. 수신자 창에 ‘진상’ 민원인의 전화번호가 뜰 때마다 몸이 굳는다. 통화 중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매뉴얼 응대’를 한다.

 ‘웃으며 우는’ 이들의 항거가 시작됐다. Q씨같이 고약한 민원·항의에 시달리면서 표정을 숨겨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이 인터넷·언론에 쌓인 감정을 쏟아낸다. 텔러·의사·간호사·경찰관 등이 ‘진상 고변’에 동참한다. 도화선은 포스코에너지 임원의 승무원 폭행사건이었다. 때마침 유명 베이커리업체 회장이 장지갑으로 주차 안내를 하던 호텔 지배인의 뺨을 때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비난과 불매운동에 시달리던 회장은 사업 포기까지 선언한다.

 진상(進上)은 원래 진귀한 물건을 윗사람에게 바치는 행위지만 현대 민속적인 의미가 새로 생겼다. 을(乙)에게 꼴불견 행위를 하는 갑(甲). 한국 사회의 속물심리가 구성해 낸 신종 의미다. 무례한 갑, 억장이 무너지는 을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갑과 을, 진상과 피해자는 움직이는 존재다. ‘진상 고변’ 댓글에는 공무원·텔러·의사·간호사·경찰관에게 상처 입은 민원인·고객의 스토리가 제법 있다.

 Q씨 같은 일선 사회복지직의 애환을 다룬 특집기사를 중앙일보 토요판(2013년 4월 13일)에 기고한 뒤 몇몇 독자가 의견을 보내왔다. 한 분이 ‘좀비 공무원’ 문제를 지적했다. 경기도 성남에 산다는 이 분은 관할 주민센터 공무원에게서 인간미·온기를 못 느낀다고 했다. 뭘 물어보면 눈을 맞추지 않고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친절한 기계음을 낸다는 것이다. “아 네, 그건 규정상 안 되고요,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선생님.” 우리 대부분은 감성노동 제공자이자 수혜자, 진상의 피해자이자 그 스스로 진상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인류는 앞으로 감성노동을 줄일 수 있을까. 가치 판단을 떠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산업사회 들어 기계는 육체 힘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육체노동자의 입지는 좁아졌다. 정보사회에서 컴퓨터·로봇이 단순 지능·서비스를 대신하기 시작한다. 아직 감성·예술은 인간의 것이다. 그런 분야에서 일자리를 늘릴 수밖에 없다. 다만 극단적이고 비인도적인 감성노동은 명백한 미래사회의 적이다.

 진상과 좀비의 대결은 개인 탓일까. 며칠 전 국회에서 열린 ‘감성노동’ 토론회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기업의 ‘고객졸도’ 경영이 극단적 진상 고객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고객이 난장을 벌여도 종업원에게 친절을 강요한다. 정부·지자체 역시 주민행복시대를 열겠다면서 준비 없이 복지서비스를 늘려 좀비 공무원을 만든다. 진상과 좀비가 벌판에서 대립할 때 기업·정부는 나무 뒤에 있다.

 실천이 쉽지 않지만 해법 자체는 단순하다. 기업·정부가 감성노동을 육체노동처럼 관리하면 된다. 육체노동 중심의 노동관계법을 감성노동 시대에 맞게 보완하자. 쉼 없는 육체노동은 없다. 휴식시간을 준다. 다치면 산업재해로 처리한다. 감성노동은 어떤가. 육체적으로 덜 힘들다는 이유로 쉼 없는 감성노동을 요구한다. 감정이 심하게 다쳐도 외면한다. 폭력에도 고객·민원인이라며 눈을 감는다. 극단적인 진상이 극단적인 좀비를 낳고 다시 진상을 낳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법·지침은 중증 진상·좀비 퇴치용이다. 사소한 감정 갈등은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즉효약이다. 우리 사회는 그 훈련을 좀 더 해야 한다. 메일을 보내온 성남의 민원인에게 좀비 공무원의 입장을, 사회복지사에게 진상 민원인의 입장을 각각 적어 보내봤다. 곧 답장이 왔다.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 입장 이해 갑니다.”

 “당분간 참아야겠네요.”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