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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계 정치인 성적 매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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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깨끗한 재물로 맑은 정치를 만들자(淸富淸政)'.

새해 초부터 일본 재계가 정치에 적극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는데도 정치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자 재계가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것이다.

◇정치 중립에서 정치 리드로=일본 재계의 총본산인 닛폰게이단렌(經團聯)의 오쿠다 히로시(奧田碩)회장은 최근 정치인의 업적을 평가해 정치헌금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일 잘 하는 정치인에게 정치헌금을 몰아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로비자금에서 벗어나 건전한 정치인을 육성하기 위한 정치헌금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게이단렌은 10년 전부터 정경유착이라는 비난에 따라 개별 기업의 정치헌금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이번에 정당.정치인을 평가해 회원기업의 정치헌금을 단체 차원에서 조정하겠다고 함으로써 정치적인 영향력을 다시 늘리게 된 셈이다.

재계 거물인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71) 교세라 명예회장도 정치후원 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생들이 결성한 '일본 프런티어회'의 선거운동과 개혁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에서 기업인이 개혁 성향의 특정 정치그룹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마쓰시타 정경숙은 마쓰시타그룹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일본의 리더를 키우기 위해 설립한 곳이어서 더 관심을 끈다.

◇왜 재계가 나섰나=일본 정치가 계속 파벌과 정략에 좌우된다면 경제를 회생시킬 획기적인 구조개혁이 불가능하고 국가발전의 비전도 없다는 위기의식이 재계 리더들 사이에 교감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일본 기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데 비해 일본 정치는 후진국 수준이라는 불만이 많았다.

재계는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집권하자 정치.경제에 대한 획기적인 개혁을 기대하며 지지했으나 2년이 지나도록 성과가 나오지 않자 이번에 독자적인 노선을 내건 것이다.

◇어떻게 정치 개입하나=게이단렌은 2004년부터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업적평가 시스템을 마련할 예정이다. 게이단렌이 추구하는 정책을 실현하는 데 누가 얼마나 기여했느냐에 따라 점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게이단렌은 개별 정당과 정치인의 '성적표'를 회원 기업들에 제공해 정치헌금의 판단기준으로 삼도록 할 계획이다.

게이단렌은 특히 정치헌금이 대가성 로비자금이 아니라 인센티브가 되도록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평가 대상에는 여.야당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당장 오는 4월의 지방선거부터 직접 유세장을 돌며 '일본 프런티어회' 후보자들에 대한 후원 연설을 한다. 선거 후에는 당선자의 공약사업을 실현시키는 데도 적극 지원할 예정이다.

◇정경유착 우려 없나=정치인 입장에서는 게이단렌의 정책을 추구하면 '성과급'을 많이 받는다. 이 때문에 자칫 종래의 로비자금과 큰 차이가 없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또 이나모리 명예회장처럼 재계의 거물이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할 경우 선거에 적잖은 파급효과를 준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게이단렌은 기업이 정치인.정당에 접근해 사익(私益)을 챙기는 대가로 제공하는 로비자금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재계 공동의 정책실현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이단렌이 공동으로 내건 주요 정책은 ▶소비세율 인상▶지방자치제 개혁▶외국인 노동자 수입조건 완화 등이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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