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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피로감과 판도라의 상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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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호 29면

“미국이 우리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니고….”
북한이 제3차 핵실험 이후 대남 도발 위협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베이징에 있는 한 외국인이 북측 인사로부터 들었다는 발언을 전했다. 20여 년간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하면서 각국 정부가 느끼는 소위 ‘북핵 피로감’ 못지않게 북한 스스로 느끼는 안보 피로감도 상당하다는 거다. 미국과 20여 년간 협상을 벌여왔지만 아직 그들이 원하는 안보 보장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써니 리의 중국 엿보기

긴장 상태의 ‘현상유지’는 북측에도 적잖은 타격을 주는 모양이다. 유엔 소속으로 평양에서 2년간 살았던 한 유럽인은 한·미 공동 군사훈련 시기에 평양 시민들이 비상식량을 들고 지하 방공호로 대피하는 등 북한 사회가 ‘올 스톱’된다고 전했다. 남쪽에서 보면 방어 훈련이지만 북쪽에서는 ‘실제 상황’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이 가하는 도발 위협은 정전협정 60주년에 즈음한 몸부림 또는 초조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북핵에 대처하는 미·중의 자세가 어느 때보다도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지난달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안이 통과된 후 한반도 위기 해소를 위한 ‘출구전략’에 소홀하다는 느낌이 든다. 미·중 양국은 서로를 겨냥해 ‘책임론’을 제기한다. 중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고작이다.

6자회담 참가국의 어느 외교관은 이렇게 진단했다. “미·중 모두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지 않은 거다.” 여기서 말하는 판도라의 상자란 이미 제3차 핵실험까지 마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느냐 여부일 것이다. 개별 국가의 핵보유보다는 지역 관리 차원에서 핵문제를 바라보는 미국은 북핵 문제를 ‘비핵화(denuclearization)’가 아니라 ‘비확산(nonproliferation)’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물론 미국 쪽에선 단호히 부인한다. 하지만 중국의 한 관방 학자는 “미국의 북한 핵 정책에는 저선(底線·bottom line)이 확실히 설정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북핵을 바라보는 중국의 정책에도 당연히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중국 내부에선 일부이지만 ‘북한의 핵 무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다. 북핵이 작은 수준에서, 그리고 주변국의 핵 경쟁을 유발하거나 미군의 한반도 장기 주둔의 구실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차이젠(蔡建) 푸단대 교수는 공개적으로 ‘북한 핵을 인정하자’는 현실론을 펼친다. “북핵을 저지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나갔다. 이제 비핵화 목표는 요원해졌다. 북핵 포기 압박보다는 북핵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논리다. 중국 스스로 옛소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핵 개발을 감행한 사례를 들어 북한의 핵 개발 욕구에 대한 ‘동정론’도 있다. 그렇다면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순 없다”며 완강히 북핵을 반대하는 한국의 입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6자회담 참가국들이 요즘 드러내는 무기력한 태도는 단지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북핵 협상의 ‘피로감’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혹시 중국 CC-TV의 시사프로그램 사회자가 사석에서 말한 것처럼 미·중이 한반도 위기 상황을 덮는 대가로 북핵을 인정하려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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