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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 속의 9·28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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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로당」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인간의 위대한 면모를 감동 깊게 보여주고 있다. 중세말기, 이른바 백년전쟁 당시「칼레」시는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공포와 절망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비참의 극치이기도 했다.
그때 6명의 시민은 맨주먹 맨발로 「칼레」시 성문의 열쇠를 움켜쥐고 영 왕 「에드워드」3세의 진영에 항거했다. 이 영웅적 행위를 기념하는 작품이 바로 「로당」의 조각이다. 공포와 절망과 주저와 실의 속에서, 그러나 분연한 결의. 그것에 충만한 인간의 섬뜩한 섬광과 의지를 상상해 보라. 「로당」의 이 조각은 현재「칼레」시의 광장에 우뚝 서서 그때의 감동을 면면히 이어준다.
9월28일은 우리 나라가 6·25 동란 속에서 수도를 다시 찾은 날이다. 수도의 탈환은 국가의 탈환이나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그후 1·4 후퇴로 다시 서울을 잃어버렸었다. 전란은 수도를 두 번이나 휩쓸었다.
서울을 잃었던 기억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가지가지의 아픔을 일깨워준다. 유랑생활, 굶주림, 향수,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관이 와르르 무너진 것도 이때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외인병사들이 세계의 각지에서 몰려오고, 그들의 군화에는 또한 낯선 생활양식과 풍속이 묻어 들어왔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켰던가. 수도를 잃고, 가치관을 잃고…. 그리고 아들을 전장에 보낸 부모의 심경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오늘 서울에는 전흔이 없다. 구석구석에서도 그런 흔적은 말끔히 사라지고 있다. 전전의 서울보다는 몇 갑절 눈부시게 변모했다. 「빌딩」이 숲을 이루고, 대로가 틔고, 사뭇 문명의 감각마저 넘쳐 보인다. 그러나 시민은 무엇인가 또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을까. 서울의 거리에는 전전의 어느 때인가 처럼 허욕과 사치가 넘실거리지는 않는가. 「칼레」의 시민은 언제나 「로당」의 감동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때의 결의와 의지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9·28 은 잊어도 좋은 건망증의 일지는 결코 아니다. 「칼레」의 정신은 우리에게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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