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공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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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동안 국시라는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한 일도 있지만 해방이후의 대공투쟁이 거듭 되어나오는 동안에 우리들은 어느덧 반공이라는 것과 자유라는 것과를 혼동하고 동일시하는 습성을 지니게된 것 같다.
이러한 습성은 6·25라든가 4·19라든가 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더욱 증장되어 마침내는 우리 국민의 자유에 대한 이해력과 실현능력을 남달리 특출하게 자부하는 그릇된 경향마저 생겨난 것 같다.
물론 오늘날 우리들은 자유진영의 일원이며 또한 가장 과감한 반공국가의 하나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는 것과 고도한 자유를 이미 실현하고 있다는 것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서도 열등생으로만 끝나는 학생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이러한 경우에는 공부를 하겠다는 결의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사실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과는 하등의 인과관계도 없는 것이다. 수신도덕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결의와 노력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라고 역설하지만 중요한 것은 목적의 실현에 있는 것이지 이러한 알맹이가 빠지고 보면 그 과정이란 신통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자유라는 문제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공산세력과 싸운다는 것은 자유를 실현하고 수호하기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겠지만 그것만으로써 자유에 대한 책무가 완수된다는 것은 아니다. 요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실현하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려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4·19직후의 일이지만 나는 어떤 외국인에게 우리 국민이 지니고 있는 자유에 대한 고도한 이해력과 능력을 대언장담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상대방은 몹시도 난처하다는 듯한 야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였고 이 기억은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부끄러움을 되살아나게 한다.
역사적으로 봐서 자유의 이해력은 자유 그 자체의 실현도에 비례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유의 이해과정은 자유의 실현과정에 병행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명백한 진리를 체득함이 그처럼 뒤늦었던 것이다. 과거에 우리 국민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 아무리 용감하였다고 하더라도 자유를 실현하고 자유를 누려본(물론 상대적으로나마) 보람찬 대목이 얼마나 있었던가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령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근대 과학에 대한 지식과 역량이 부족하다고 하면 누구나가 이를 시인하면서도 자유에 대한 이해와 역량이 빈약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분개한다.
자유라는 것을 이렇게 만만하게 여기는 까닭에 그들이 참다운 의미의 자유, 즉 역사적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의 자유라는 것을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길현모<서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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