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뉴스위크] 고급차 업체들 눈높이 낮추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캘리포니아州 셔먼 오크스에서 사는 모린 토타로는 딸 마리사의 16번째 생일에 벤츠 승용차를 사주기로 결정한 후 이웃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됐다.

그녀는 “딸 애가 버릇없는 부잣집 아이로 보일까봐 염려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토타로는 딸에게 차 열쇠를 건네주기 전 딸 친구들의 부모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리사에게 사준 C230 모델은 가격대가 최저 2만5천달러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모델을 선택한 이유는 에어백이 8개나 장착돼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리사가 자신의 푸른색 벤츠를 학교에 몰고 갔을 때 친구들은 에어백보다 자동차 그릴(엔진 방열판)에 달린 은별(벤츠의 엠블렘)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 호화 승용차는 더 이상 부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벤츠를 비롯한 다른 많은 고급 승용차 업체들이 젊은 고객층 확보와 매출 증대를 목표로 3만달러 이하의 모델들을 내놓고 있다.

수십만달러짜리 호화 승용차로 유명한 재규어는 BMW와 렉서스의 저가 모델들과 경쟁하기 위해 최근 2만9천9백50달러짜리 X-타입을 출시했다. 이런 새 모델들의 출시로 현재 미국 승용차 시장에서는 저가 호화 승용차 판매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올들어 미국의 전체 승용차 매출은 4.3% 감소했지만 저가 호화 승용차의 매출은 23% 상승했다. 이들 저가 모델은 현재 호화 승용차 부문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급 스포츠형 다목적차량(SUV)의 매출을 능가하고 있다.

이처럼 저가 호화 승용차가 붐을 이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소수의 상류층 고객만 상대해서는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새 모델 X-타입으로 연간 매출량을 7만5천대로 배증시킬 계획인 재규어 미국 지사의 마이크 오드리스콜 지사장은 “소수의 명품 승용차들만 팔아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말했다. 요즘 호화 승용차 업체들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자사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모델들까지 내놓고 있다.

포르셰는 곧 SUV를 선보일 예정이며 캐딜락과 링컨은 픽업 트럭을 출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새로운 세대의 고객층 확보를 꿈꾸는 저가 호화 승용차 부문이다.

BMW는 2만7천달러대의 3시리즈 스포츠 세단으로 젊은 구매자들을 유혹한 다음 5만달러대의 5시리즈나 8만달러대의 7시리즈로 업그레이드하도록 유도하는데 최선을 다해 왔다.

고객층의 확장을 꾀하는 것은 호화 승용차 업체들 뿐이 아니다. 이는 요즘 랠프 로렌(패션)부터 티파니(액세서리)까지 모든 호화 사치품 업체들의 공통적인 경향이다. 오드리스콜은 “사치품 업계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의 왕실격인 호화 승용차 업체들이 자사 제품의 싸구려 모조품 제작업체로 전락하고 있는 것일까? 호화 승용차의 내장재에서 가죽·목재를 너무 많이 빼다 보면 결국 포드의 ‘토러스’처럼 평범한 제품에 화려한 보닛 장식을 붙인 ‘무늬만 호화로운 승용차’를 만들게 될 것이다.

요즘은 비용을 절감하려는 기업들이 고급 제품에 일반 제품의 부품을 섞어 쓰고 있어 일류 상표의 명성에 먹칠을 할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

재규어와 볼보는 포드 모델의 섀시(차대)를 이용하고 있으며, 벤츠는 크라이슬러의 부품을 이용한다. 일부 호화 승용차 업체 간부들은 자신들이 도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BMW 간부 출신으로 현재 포드의 호화 제품 라인을 운영하고 있는 볼프강 라이츨레는 “젊은 고객층 확보와 매출 증대라는 성공의 이면에는 명품의 희소가치성 상실이라는 부작용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저가 호화 승용차 분야는 안정된 사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1981년 ‘시마론’ 출시 이후 오랜 쇠퇴의 길을 걸어온 캐딜락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그 제품이 겉만 화려하게 치장한 시보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또 벤츠와 재규어의 경우에도 이미 기존 명성에 걸맞지 않은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뉴욕 타임스紙는 벤츠 C230에 대해 ‘디자인이 좋지 않다’고 평했다. 또 오토모빌 매거진은 ‘베이비 벤츠’보다 현대의 XG350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 “자동차 시장에 은별을 마구 뿌리다가는 브랜드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벤츠측에 경고했다.

벤츠 미국지사의 폴 할라타 지사장은 “언론은 벤츠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이유로 벤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놀랄 만한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브랜드가 무리하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최근 J.D.파워 앤드 어소시에이츠가 실시한 제품의 장기적 신뢰도에 관한 조사에서는 벤츠의 전설적인 품질이 캐딜락과 링컨 밑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할라타는 벤츠가 SUV와 저가 모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성장의 고통’을 겪었지만 이제 그것을 치유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BMW는 호화 승용차의 하한선을 시험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현재 개발 중인 소형 1시리즈를 2년 후 미국에서 최저 약 2만달러에 출시할 계획이다. BMW는 대형 SUV가 주종을 이루는 미국에도 휘발유 소비가 적은 고급차 시장이 (특히 환경을 생각하는 Y세대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렉서스의 마케팅 부사장 마이크 웰스는 “2만달러짜리 제품에 호화 승용차의 특징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BMW는 올 여름 판매업자 중 일부를 독일에 보내 1시리즈의 디자인 컨셉트를 검토하도록 할 예정이다.

BMW 판매업자 프랭크 어소마소는 “어느 정도까지를 BMW의 명성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문을 가질 정도라면 이미 호화 승용차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 아닐까?

출처:뉴스위크 Keith Naughton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