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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죽고 나 죽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죽여라, 죽여!』
반동분자를 규탄하는 인민재판의 대사가 아니라, 이것은 한 세대전 미련한 남편에게 맞다맞다 못해서 발악쓰던 아내들의 비명소리인데 여성의 지위가 부쩍 향상된 요즈음엔 찾아볼 수 없는 숭고한 가락이 깃들인 명구다. 차마 나를 정말 죽이 지야 않겠지 하는 사랑의 굳은 믿음이 전제되고 또 나는 몽땅 당신의 것, 차라리 나를 죽인들 다마하랴는 절대희생의 정신이 가련하다.
오해 교섭을 끌며 사주궁합을 요리조리 뜯어맞춘 후 가일을 택해서 자리를 마련하여 중인 축복 속에 백년해로, 아들딸 잘 낳고 화합해서 지내라는 부부 사이에도 죽여라 나가라 싸움이 돌발하니 인간이란 에이 참! 그러니 지금 세상을 어둡게 하고 있는 여니 야니 하는 싸움도 무리랄게 없지. 그거야 원래가 꿀보다 맛있는 정권을 뺏느니 안뺏기느니 기를 써야만 하는 험한 판인걸. 뭐 나무라봤자.
그러나 사랑의 전제가 있어 부부싸움이 용서되듯이 여·야의 싸움이 용서되자면 그 밑바닥엔 공통된 귀중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와 사회에 대한 책임관념이겠다. 우리모두의 일을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꾸려나가지 않는다면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인가? 그러면 누가 남나? 「데모」를 한 번 하고싶어서 근질근질하던 어린 고교생들 앞에 부끄럽지들 않은가? 정말들 이러기냐?
사회이념의 공백. 사회방위의 의식의 결여! 개인생활을 연결하는 공동체의 이념 없이 제대로 살아나갈 만큼 그만큼 인간이 강하지는 못하다. 서양사람들의 시민국가의 이념이 정말 아쉽다.
좁은 섬에 인구만 득실거리니 살길은 오직 영토확장 뿐이라고 일인들이 어수룩한 우리 나라를 덮쳐 3천리 방방곡곡에 파고들어 파출소 주임까지 독차지하고 마구 뻐길 그때 왜 한 번 너 죽고, 나 죽자고 물고 늘어지질 못하고 이제 와서 이러는가? 어른들아. 정신들 좀 차리자꾸나.
그러나 나의 경우 정신을 차리고 막상 어떻게 해야할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당분간 교육 안해도 좋은지, 일찌감치 방학을 했으니 나는 목하 휴업상태에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이를 먹은 것이.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이. 특히 제자들 앞에서. 미안미안 미안! 강복식<고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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