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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대남 공작단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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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적사항
▲구속 정규명(39세) 물리학 석사 본적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 108 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45 거처 서독 그라헨부르크 암체스트 하우스 52 프랑크푸르트 대학 이론물리연구원
▲구속 강혜순(여·33세·정규명의 처) 본적 충남 서산군 원북면 방갈리 주소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45 거처 서독 그라헨부르크 암체스트 하우스 52 무직
▲구속 박성옥(36세) 본적 서울특별시 성동구 홍익동 889 주소 부정 거처 서독 카스트럽 추라우셀 발덴부어가 80 광부
▲구속 김성칠(33세) 본적 전남 무안군 현경면 현화리 830 주소 동상 거처 서독 카스트롭 라욱셀 4 핀커호프 광부
◇범죄사실
피의자 정규명은 1946년 6월 25일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9월 1일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 1948년 6월 20일 동교 2년을 수료, 동년 9월 1일 동교 문리대 물리학과 1년에 입학 재학 중 6·25 사변이 나자 동년 7월 중순경 동교 민청에 가담 활동타가 동년 7월말일 경 괴뢰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여 충남 서산지구 전투에 참전, 9·28 수복 당시 충북 진천에서 미군에 생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1952년 8월 일자미상 경 영천 포로수용소에서 위장진술로 석방된 후 1954년 4월 1일 서울문리과대학 물리학과 3년에 복교하여 1956년 3월 28일 동교를 졸업 동년 4월 1일 동교 대학원 물리학과 석사과정에 입학, 1958년 3월 28일 동교를 졸업한 후 동년 11월 1일 도독 「프랑크푸르트」대학 자연과학부 물리학과에 입학, 1962년 12월 28일 동교를 졸업하고 1963년 5월 1일 동교 이론물리연구소 연구원으로 현재에 지한 자인바
1. 1961년 6월 일자미상 경 서울에 있는 약혼녀인 상피의자 강혜순으로부터 6·25 당시 괴뢰 의용군으로 입대하였다가 행방불명된 자기 오빠 강동순(39세) 강남순(37세)의 소식을 동독을 통하여 알아달라는 서신요청을 받고 동년 6월말 경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인 상피의자 임석진의 기숙사를 찾아가서 상의 북괴대사관원과 접선 코 확인하자는 데 합의한 후
1961년 8월 중순 오전 10시경 「프랑크푸르트」대학 이론물리학연구실에서 임석진과 접선, 동일 11시경 동인의 안내로 「프리드리식」역에 도착, 북괴공작책 이원찬과 접선, 입동목적을 상의한즉 이원찬은 그 사람은 내가 잘 알고 있는데 강동순은 함흥전기기술학교 교장으로 활약중이고 강남순은 평양시에서 건축설계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울문리대 동창들로서 6·25 당시 의용군에 입대, 행방불명된 정해철(39세) 정해원(39세) 변동식(39세) 홍순택(39세) 등의 소재를 알아달라고 부탁한 후 그곳에서 임석진과 같이 일박을 하면서
이원찬이 갖다주는 박헌영의 재판기록을 열독하고 익일 오후 1시경 이원찬으로부터 동독지구 경계선 통과증과 공작금조로 각각 미화 100불씩을 수수한 후 익일 오전 3시경 「프랑크푸르트」로 귀환한 사실이 있고
2. 1961년 8월말 경 서울에 있는 전시 약혼녀 강혜순에게 수사기관에 의해 사실이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두 오빠는 미국에서 잘살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위장서신을 전달함으로써 동인들이 북괴에서 건재 하다는 것을 인식케 하고
3. 1962년 3월 일자미상 경 이원찬과 서신연락이 되어 동인으로부터 전시 강동순 및 강남순의 면담주선약속을 받고 약 2일 후인 정오 경 「프랑크푸르트」역전에서 임석진과 만나 전회와 동일한 방법으로 입동하여 2일간 유숙하면서 동 이원찬에게 자서전을 작성 제출하고 동소에서
(가)포섭대상자로 서울대학교 동창생들인 서독 「멘퀸」공대 물리학과 학생 안석교(39세) 불란서 「슈트라스부르크」교 연구소 연구생 장수창(39세) 영국 「리바풀」대학 화학과 학생 주충노(38세) 등의 명단을 작성 제출한 후
(나)학습교양과 기술교양으로서 기본암호해득방법 및 조립방법, 정치교양으로서 남한은 평화통일이 되어야만 잘살 수 있다는 등의 교양을 마친 후
(다)서신연락방법으로서 하향식일 때에는 발신인 주소는 임의로 하되 성명은 일본인 또는 한국인 명을 사용하고 수신인 주소성명은 「프랑크푸르트·발트스트라세」52 정규명으로 한다.
상향식일 때는 발신인 주소와 성명은 임의로 독일인 주소 성명을 사용하되 이름만은 「도로데아」로 사용하고 수신인 주소 성명은 동백림 「카르스호르스트·옴·크리가·스트라세」21 「한백」앞으로 한다는 등의 교양을 받은 후
(라)지령사항으로서 서서 「제네바」시에서 구주통합 핵 연구소 연구원으로 종사 중인 서울대 선배인 진영선(41세)을 찾아가 재북 중인 홍순택의 서신을 전달, 회신을 받은 동시 동인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마)공작금품으로서 홍순택의 서신 1통, 기본 암호표 및 송수신 난수표 1조, 미화 200불 등을 수령한 후 임석진과 같이 「하노바」역 경유 「프랑크푸르트」에 귀환하여 전시 지령사항을 실천할 목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제네바」공항에 도착 진영선가를 방문 접촉하고 동인에게 동 서신을 전달 코 회답을 요구하였으나 동인은 뜻밖에 친구의 서신을 접하여 반갑기는 하나 그런데 있는 사람에게 회답을 할 수 없다고 거절당한 후 5일간을 동지에 기거하면서 계속 포섭공작을 하였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프랑크푸르트」로 귀환하여 동년 4월 초순경 동결과를 암서화하여 북괴공작원 이원찬에게 보고함으로써 간첩행위를 하였고
4. 1962년 8월 일자미상 경 전시 이원찬으로부터 전시 재북중인 정해원의 서신을 접견하여 동인이 6·25 당시 월북하여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동교 물리학과 교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동 소에서 「평화통일방안」 「남북문화교류」등에 대한 교양을 재습득한 후 서울에 있는 약혼자 강혜순을 속히 입독케 하여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조로 미화 700불을 수령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귀환하고
5. 1962년 8월 20일 경 「프랑크푸르트」소재 「루프트한자」항공사로부터 강혜순이가 입독하는데 소요되는 여비를 지불하라는 전보를 접수하고 동일 오후 1시경 동사를 방문, 공작금 중에서 미화 729불을 지불하고 1962년 9월 2일 오전 5시경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전시 강혜순을 만나 재북 중인 강의 두 오빠의 소식을 알게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강혜순에게 동독에 왕래하여도 여권에 아무런 흔적이 나지 않게 기술적으로 왕래할 수 있으니 안심하고 같이 갈 것을 권유하여 동 강혜순을 유인하고
6. 동년 10월 일자미상 경 전 거주지로부터 「케이시·라하스트라세」48 소재「아파트」로 이도하여 동 가에서 전시 이원찬에게 전시 암호연락방법에 의거 주거지 이전사항과 동 강혜순을 포섭하였다고 보고하고
7. 동년 10월 중순 일자미상 경 동 이원찬으로부터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강혜순과 같이 오라는 지령을 받고 1962년 10월 20일경 입동하여 이원찬과 접선, 동인의 안내로 안전가옥에 수용되어 2박하면서 동 소에서 강동순 및 강남순에게 서신을 작성, 이원찬으로 하여금 전달케 한 후 동 소에서 강혜순과 같이
(가)선전화보인 등대, 노동신문, 북괴의 발전상 등에 대한 교양을 받고
(나)지령사항으로서 ①전시 안석교 장수창 주충노 등을 포섭, 대동 입동할 것이며 ②재구 유학생 및 친지 포섭 ③한국에 있는 학생을 유치 포섭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500불을 수수한 후 귀환하였으며
8. 1962년 12월말 경 다시 이원찬과 접선, 안전가옥에 수용되어 동 소에서 3박하며 지령사항으로서 불란서 파리 소재 「샹제리」에서 중국요리점을 경영하는 전영희를 찾아가 재북중인 동인의 실제 전모의 서신을 전달하고 회답을 받는 동시 동인의 사상동향을 파악 보고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1,000불을 받은 후 1963년 1월 초순 일자미상 일 오전 11시경 귀환하고
9. 1963년 3월 21일 오전 7시경 처를 대동하고 전시 지령사항을 실천할 목적으로 동 월 23일 오후 3시경 전시 전영희의 주소지(미상)로 동인을 방문 접촉하고 동 서신을 전달한 후 동인과 수차 접촉하면서 사상동향을 파악한바 동인은 북괴와 같이 자유가 없는 공산주의에는 동조할 수 없다는 태도를 확인하고 동 월 26일 오전 10시경 동인으로부터 회답을 받아 이원찬에게 암호방법에 의하여 보고하고
10. 1963년 4월 초순 일자미상 일 오전 10시경 전시 이원찬의 지령에 의하여 주충노를 포섭할 목적으로 처 강혜순을 데리고 「런던」을 경유 「리바풀」에 있는 주충노 가를 방문 접촉, 포섭하였으나 동인은 곧 귀국한다고 하여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귀가한 사실이 있고
11. 1963년 5월 일자미상 일 오전 11시경 이원찬에게 전시 주충노 및 전영희와의 접촉상황을 상보하는 동시 전시 전영희로부터의 회신을 이원찬에게 제공하고 동 소에서 이원찬으로부터 조용래 학생이 서독「뮌스타」대학 경제학과에 재학중인데 재북중인 동인의 매부(성명미상)의 서신을 전달하고 회답을 받아 오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400불을 수령한 후 동년 7월 일자미상 일 오전 10시경 처를 대동하고 전시 장수창을 포섭할 목적으로 열차 편으로 불란서 「슈트라스부르크」에 도착 동인 가를 방문(주소 미상) 접촉 동인 가에서 3일간 유숙하면서 포섭하려 하였으나 동인은 8·15 해방 후 월남한 자로서 북괴에서 하는 일은 모두 선전에 불과하다는 등 동 교양내용을 부인하므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귀가하고
12. 동년 8월 중순 일자미상 일 오전 11시경 전시 이원찬의 지령에 의하여 전시 안석교를 포섭할 목적으로 처를 대동 열차 편으로 서독「뮌헨」에 도착 동일 오후 4시경 동인 가를 방문(주소미상) 접촉하고 포섭코자 하였으나 동인의 태도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아 노골적인 의사표시를 못하고 익일 오전 10시경 동지를 출발 귀가한 사실이 있고
13. 1963년 12월 말 정오 경 제반 활동상황을 이원찬에게 보고 차 처를 대동하고 입동 이원찬과 만나 제반 활동상황을 보고한바 동인으로부터 여하한 방법으로라도 전시 주충노 장수창 안석교 등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가하였고
14. 1964년 3월 일자미상 경 이원찬으로부터 재차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년 4월 초순 오전 10시경 이원찬과 접선 동인으로부터 실제 정규능을 속히 도독케 하여 포섭대동입동하는 동시 전시 전영희에게 재북중인 실제 전모의 서신을 전달하고 동인을 포섭대동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1,750불을 수령 귀가하고
15. 1964년 월일미상 일 11시경 「프랑크푸르트」뇌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박일진(36세)이 자가에 내방하였을 시 동인이 고향인 개성에 있는 자기 모친의 소식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동인에게 동백림에 가면 그 소식을 알 수 있으니 같이 입동하자고 꾀어 1964년 6월 초순 11시경 동인을 대동 입동하여 이원찬과 접선케 하고 안전가옥에 수용되어 일박하면서 이원찬에게 박일진의 본적지 및 개성 주소를 적어준 후 익일 오전 10시경 공작금 미화 100불을 수령 귀가하고
16. 1964년 7월 12일 오전 10시경 이원찬으로부터 긴급사항이 있으니 서서 입국「비자」를 가지고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 월 14일 오전 9시경 입동 이원찬과 접선 동인으로부터 지금 서서「쯔리」시에서 개최 중에 있는 국제기계체조심판원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신흥대학(경희대학) 교수 문모(성명미상)가 참석하고 있는데 동지에 가서 동인에게 난수표를 전달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품으로 미화 300불, 난수표 1조 등을 수령한 후 동년 7월 15일 오전 11시경 서서「쯔리」시에 도착하여 일본대표에게서 한국대표가 미참한 것을 확인하고 동지에서 엽서로 이원찬에게 『일본상품은 있는데 한국상품은 없다』라고 접선치 못하였다는 보고를 한 후 귀가하고
17. 1964년 8월 일자미상 경 이원찬으로부터 전시 문모에게 전달하려던 난수표를 지참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년 9월 20일 오전 11시경 입동 이원찬과 접선, 난수표를 반환하고 동인으로부터 실제 정규능을 대동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1,000불을 수령한 후 귀가한 사실이 있고
18. 1964년 10월말일 경 전시 이원찬으로부터 1964년 12월 7일 서독을 친선 방문하는 박 대통령이 「본」에서 갖는 유학생들과의 조찬회 석상에 참석하여 박 대통령에게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라는 지령을 받은 사실이 있으나 이를 실천치 못하고
19. 1964년 12월 23일 오전 11시경 전시 박일진과 만나 동인을 대동 코 입동하여 이원찬과 접선, 이원찬으로부터 박일진 모친의 서신을 받고 회신을 작성, 이원찬에게 전달케 하고 공작금으로 미화 150불을 수령한 후 귀가하고
20. 1965년 6월 초순경 이원찬으로부터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 월 중순 오전 11시경 입동, 이원찬과 접선, 동인으로부터 (가)가족혁명을 하라 (나)직업혁명가가 되라는 등의 교양을 받고 지령사항으로서 (가)처 강혜순과 같이 평양에 가서 강동순 강남순을 접선하라 (나)지금까지의 공작방향을 바꾸어 기본출신인 광부 포섭에 전 역량을 집중시키라 (다)광부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포섭하라 (라)「카스트로프」「라옥셀」「휘캐호프」에 있는 광부 중 충남출신이며 과거 사회대중당 대전지부 선전부장을 역임한 박성옥(37)을 포섭하라 (마)박성옥의 이복형 박성대가 재북중이니 동인의 서신을 박성옥에게 전달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1천불을 수령한 후 귀가하고
21. 1965년 7월 중순 오후 8시경 전시 박성옥을 포섭할 목적으로 박성옥의 기숙사로 동인을 방문, 나는 「프랑크푸르트」에서「도르트문트」로 가는 도중 이곳에 한국광부들이 있다고 하여 들렀는데 명패에 박성옥이란 이름이 있어 내가 어려서 대전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아는 박성대라는 사람과 혹시 친척이 아닌가 하여 들렀다고 위장, 구실을 말하고 동인으로부터 주식을 제공받은 후 동인에게 앞으로 언어가 안 통하여 곤란할 때가 있으면 하시든지 자기에게 서신연락을 하라고 주소·성명을 적어주고 그곳을 출발, 열차 편으로 귀가함으로써 1차 접선과 연락유지에 성공하고
22. 1965년 8월 초순경 전시 이원찬으로부터 처 강혜순을 대동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동하여 이원찬과 접선, 이원찬에게 전시 박성옥과의 접선상황을 보고하는 동시 동인으로부터 앞으로 입북하면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학습을 많이 하여야 된다는 것을 강조 받고 익일인 7월 9일 오전 10시경 동백림 소재「센휘트」비행장에서 이원찬으로부터 가명으로 된 자신과 처 혜순의 여권을 각각 수교받고 이원찬의 안내로 동일 오후 2시경(모스크바 시간)「모스크바」경유 7월 10일경 평양에 도착, 지도부 부부장을 면접하고 중요시설과 명승지를 구경 후 17일 오후 1시경 지도부장인 조모(50세 가량)·이원찬·지도과장·지도원 등의 입회 하에 북괴 노동당에 입당함과 동시 당증번호를 부여받음으로써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되고 오후 3시경 강혜순과 같이 동 지도원의 안내로 전시 강남순(37세)과 동인의 처(성명미상) 및 강동순과 면접한 후 동일 오후 1시경 소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있는 임춘추를 면접하고 동인으로부터 자신의 항일 빨찌산 투쟁 당시의 경험담에 관한 교양을 받은 후 8월 21일까지 4일간에 환하여 전시 지도과장 및 지도원으로부터
(가)중간 정당(공산당)을 건설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합법이 허용되는 혁신정당 같은 간판을 내걸고 지도자는 반공을 부르짖지 않은 사람이 좋고 그 슬하에 들어가 열성당원을 시켜서 활동하라
(나)현시와 같은 때에는 저명인사를 당수로 하고 중견인물들 속에 「푸락치」를 넣어 그 당이 평화통일을 정강으로 하는 당을 만들라
(다)우익 정당과의 통일전선은 하부당원 중 신망이 있는 당원을 포섭하여 당의 성격을 변질토록 한다.
(라)서독 광부 다수 및 유학생을 포섭 지하당을 조직하였다가 그들이 귀국 후 각 직장 또는 연고지에 지하당 조직을 확대케 하여
(마)결정적 시기에 일제히 봉기케 하라는 등의 교양과 지령을 받은 후 공작금으로 미화 1,300불을 수령 코 동년 8월 31일 오전 10시경 공로「프랑크푸르트」에 도착 귀가함으로써 공산주의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23. 1966년 6월 일자미상 경 박성옥으로부터 동년 6월말 경에 7일간의 휴가를 득하겠는 데 기 시간을 이용하여 같이 입동할 수 있느냐는 서신을 받고 즉시로 동인에게 하시든지 같이 갈 수 있으니 휴가를 득하는 대로 자가를 방문토록 서신연락을 하여 동년 6월 22일 오후 8시경 자가를 방문한 박성옥과 접선 코 익일 오전 9시경 동인을 입동, 이원찬과 접선, 이원찬으로부터
박성옥에게 계속 교양을 하는 동시 동인으로 하여금 계속 광부들을 포섭, 지하당을 조직케 하라는 지령을 받았고 박성옥은 통신연락방법이 없으니 제반상황은 피의자 자신을 통하여 보고하라는 지령을 받은 후 박성옥을 북괴 노동당에 입당, 선서케 하고 공작금으로 미화 200불씩을 수령한 후 각자 귀가한 사실이 있고
24. 동년 8월 일자미상 경 박성옥에게 앞으로의 보고상황은 서신을 통하지 말고 자가에 신설한 전화 0602∼52984번을 이용 보고하라고 서신으로 지시하고
25. 1966년 10월 일자미상 오후 8시경 박성옥으로부터 같이 있는 광부 김성칠을 포섭하여 동년 12월말일 경 동인을 대동 입북키로 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후 동년 11월 초순 일자미상 경 동인에게 조국통일신문 5매 등대 화보 2권 및 자신이 직접 작성한 「제국주의의 모순」(16절지 10매)을 우송한 사실이 있고
26. 1966년 12월말일 오후 8시경 박성옥으로부터 자기는 동년 12월 23일 전시 김성칠을 대동 입동하였다가 돌아 왔다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있고
27. 1967년 2월 초순 일자미상 경 북괴공작원 김모로부터 정보원들의 수사가 시작된 것 같으니 조직원들에게 보안조치를 하라는 지령을 받고 동일 동 내용을 박성옥에게 서신으로 지시하는 동시 자가에 보관 중인 불온문건 일절을 소각할 것을 지시한 사실이 있고
28. 1967년 5월 초순 오전 8시경 전시 북괴 김모로부터 입동하라는 전화를 받고 동년 5월 13일 오후 3시경 입동하여 동 김모와 접선 안전가옥에 수용되어 동인으로부터
(가)박성옥이 노출되었으니 앞으로는 김성칠을 입동시키도록 하라 (나)광부들에 대한 수사가 예상되니 경각심을 높여라 (다)박성옥에게는 매월 독화 300마르크씩을 지불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1,500불을 수령한 후 익일 오전 11시경 귀가한 사실이 있고
29. 동년 5월 17일 오전 8시경 박성옥으로부터 전화연락을 받고 동인에게 김성칠을 입동시키라는 지시를 하는 등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평양을 왕래하였고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하고 적을 위하여 부부조로서 간첩활동을 수행한 자이다.
피의자 박성옥은 1945년 4월 충북 청주사범부속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사에 종사타가 1950년 3월 2일 해군에 입대 제1함대 62함 등에서 복무타가 1958년 8월 25일 1등병조로 만기제대하고 1959년 4월부터 1960년 3월경까지 대전시 대흥동 482에서 빙과점을 자영하였고, 1960년 4월부터 1962년 6월까지 부산시 범일동 이하 미상소재에서 철물점을 경영하였고, 1962년 9월부터 1963년 4월까지 부산시 부평동 소재의 「칼맨」다방을 자영하였고, 1964년 10월 5일 노동청에서 주선한 서독파견 광부로 도독하여 「크로크나」탄광광부로 현재에 지하고 있는 자로서 피의자는 부 박규하 소실의 소생으로 14세 시 친모가 재가한 후부터 부 박규하는 물론 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고아 아닌 고아로 대전 시내에서 담배행상과 신문배달을 하였으며 서울시내 화원동 시장 소재 다과점 점원으로 전전하는 등 불우하게 성장하였으며 공산사회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중요기업체를 공영화하여 자기의 노력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동경하는 등 항상 사회주의 사상을 포지하여 오던 중 1964년 10월 5일 서독파견 제2진 광부로 도독 이후
1. 1965년 11월 25일 8시경「크로크나」광산 합숙소 2동 23호실 피의자 숙소로 내방한 상피의자 정규명과 처음으로 접선, 당시 내방 중이던 피의자의 친지인「크로크나」광산 광부 박홍찬과 3인이 옥호 미상 음식점에서 회식하는 자리에서 평화통일문제와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연구여부 및 대한민국의 경제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정과 사회주의가 좋고 조속히 통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 과거 사회대중당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다고 허위사실을 고지하는 등 자진 영합하고
2. 1965년 12월 중순경 정규명으로부터 자택에 놀러오라는 서신에 접하여 1965년 12월 23일 18시경 「프랑크푸르트」소재 상피의자 정규명 가를 전시 박홍찬과 동도 방문 일박하면서 상피의자 정규명으로부터 북괴발간잡지 등대 등 불온화보를 통하여 교양을 받은 사실이 있고
3. 1966년 3월말일 경 서독「바가데스브그」역 구내식당에서 상피의자 정규명과 접선하고 피의자 박성옥의 처자 서독 이주문제 등을 협의하는 동시 공산지역인 동독에 가려면 학술연구계통으로 갈 수 있으니 1차 동독에 갈 의사를 타진함에 따라 이에 응낙하여 북괴와의 회합을 협의하고
1966년 4월말일 14시경 「쾰른」시 모 음식점에서 상 피의자 정규명과 접선 동인으로부터 활동비 조로 미화 200불을 수수한 사실이 있으며
4. 1966년 6월 22일경 상피의자 정규명의 지시대로 피의자의 처 김복순(33세)을 대동「프랑크푸르트」소재 동인 가를 방문하고 처자는 그곳에 잔류케 하고 상피의자 정규명과 함께 입동할 것을 약속하고
5. 익 6월 23일 오전 8시경 상피의자 정규명의 안내로 북괴측 김모 공작원과 접선 각종 교양을 받은 다음 지령사항으로서 ①상피의자 정규명과 접선 동인이 지령하는 사항을 실행하라 ②서독파견 광부 중 1명을 포섭하라 ③서독파견 광부명단을 입수하라 ④노동계약기간이 만료되어도 귀국치 말고 서독에 잔류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품으로서 미화 200불을 수수한 사실이 있고, 1966년 6월 25일 13시경 동 소에서 한모 공작원 주재 하에 당증번호는 평양에 가서 수여키로 하고 북괴 노동당에 입당 북괴 구성원이 되고, 6·25 당시 서울에서 부역타가 월북한 이복형 박성대(평양시당 근무)의 문안서신을 수령, 상부에의 통신방법은 정규명과 전화로 연락하도록 지시를 받고 귀환,
6. 1966년 7월 초순 14시경 「크로크나」광산에서 같이 종사했으며 「빙케호프」에서는 같은 기숙사에 있으면서 지실하게 된 상피의자 김성칠을 피의자 가에 초대하여 북괴 발행 등대와 철학개론을 주면서 북괴 지령에 따른 포섭활동을 실행하고
7. 1966년 9월말 14시경 서독「하겐」역 구내식당에서 상피의자 정규명과 접선하고 상피의자 김성칠의 포섭경위를 보고, 정규명으로부터 상피의자 김성칠을 대동 입동하여 공산교육을 받으라는 지령과 조국통일신문 민주일보 등 5, 6매를 수령한 사실이 있고
8. 1966년 11월 초순 19시경 전화로 상피의자 정규명에게 김성칠을 대동, 66년 12월 중순경에 입동키로 합의하였음을 보고하고 상피의자 정규명으로부터 대동 입동하라는 지령을 받은 사실이 있고, 1966년 12월 19일 18시경 상피의자 김규칠 가를 방문, 「크리스머스」휴일을 이용, 66년 12월 23일 입동키로 협의 결정한 사실이 있고
9. 1966년 12월 23일 7시경 상피의자 김성칠을 대동하고 입동하여 북괴 공작원 김모와 접선 3박4일간 동독 북괴대사관 숙소에서 체류하면서 각종 교양을 받고 주소지인 「카스트롬」으로 귀환하고
10. 1966년 12월 28일 18시경 상피의자 정규명에게 상피의자 김성칠을 대동 입동 귀환한 사실을 보고하고
11. 1967년 4월말 16시경「카스트롬」시 소재 기독병원으로 문병 차 내방한 상피의자 규명으로부터 입원보조금조로 독화 350마르크를 수령한 사실이 있고
12. 1967년 5월 20일경과 1967년 6월 초순경 2차에 걸쳐서 상피의자 정규명으로부터 피의자 박성옥의 처 김복순 명의로 우송된 독화 300마르크와 350마르크 도합 650마르크를 생활비 조로 수수한 사실이 있고, 정규명을 통하여 지시된 계속 잔류하라는데 대한 생활대책 해결방안을 강구해 달라 또는 김성칠 입동에 대한 여비를 보내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 후 입동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고
13. 1967년 6월 11일 14시경 자가로 내방한 상피의자 김성칠로부터 지령대로 1967년 6월 7일 입동하여 동 6월 11일 귀환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북괴측으로부터 (가)평화통일은 실현가능이 없으므로 해방전선으로 나간다. 남반부를 무력으로 통일할 계획이라고 역설하였음을 전언받고 (나)차후지령 시까지 대기하라는 등 지령을 전달받은 사실이 있는 등 북괴 구성원으로서 북괴 지령사항을 실행하면서 간첩활동을 하여왔고 새로운 지령에 대비 암약중이던
자이다.
피의자 김성칠은 본적지에서 1948년 3월 현경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함평 중학교를 거쳐 1954년 3월 함평 농업고등학교 3년을 졸업한 후 2년간 가사에 종사타가 1956년 10월부터 약 3년간 함평군 서기로 근무, 1960년 3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서기보로 임명되어 근무 중 1961년 6월경 군에 입대, 1964년 5월 군에서 하사로 만기 제대한 후 동년 11월 26일 노동청에서 모집하는 서독파견 광부로 선발되어 파독 「크로크나」광산 광부로 현재에 지한 자인바
1. 1966년 6월경 「크로크나」광산 「핀케후푸」숙사에서 지면케 된 상피의자 박성옥의 초대로 「카스트롭」역전 소재 전시 박성옥 가를 방문하여 동인으로부터 간행물에 의한 공산주의 교양을 받고 동조할 것에 합의하고
2. 1966년 11월말 경 전시 접선장소인 맥주「홀」에서 상피의자 박성옥으로부터 동백림 북괴대사관을 방문토록 준비하라는 지령을 받고 대기 중
3. 입동 약속일자인 1966년 12월 23일 오전 6시경 피의자는 박성옥 가를 방문 동인과 같이 입동하여 북괴대사관 공작지도원 이모(40세 가량) 및 김모(35세 가량) 지도원으로부터 신상조사를 받은 후 매일 4시간씩 동 지도원으로부터
한국에 귀국하면 동조세력을 포섭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친구 중 포섭대상자로서 전일범(34·크로크나 광산 광부) 심유택(32·동) 안극(33·동) 김녕희(32·동) 백학운(29·동) 등 10여 명을 구두보고하고 연락방법으로서 상피의자 박성옥의 지령에 의할 것이며 평양입북준비와 입북일자가 결정되는 즉시 서신을 발송하되 발신인 주소는 서독 어디도 좋고 성명은 독일인 명으로 하며 수신인은 동백림 「푸이드리크 펠드바라톤스 트라세」55 Kim.Y.H로 하고 내용에 모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면 모 일자에 입북한다는 것이며 몸이 완쾌되어 입원 불요라고 하면 입북 불가능이다 라는 암호약정을 하고 동월 27일경 숙소에 귀환하였고
4. 동년 2월 초순 오후 10시경 상피의자 박성옥과 만나 서독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우리들의 활동상황을 감지하고 있으므로 극히 보안에 유의하라는 주의를 받았고
5. 1967년 6월 2일 오후 2시경 상피의자 박성옥으로부터 동독 북괴대사관에서 김성칠을 단독 입동하라는 지령이 있으니 1967년 6월 8일 입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기 중 동년 6월 8일경 박의 처 김복순(33세)으로부터 북괴대사관에 전달하라는 내용미상의 편지를 받아 입동하여 김모 공작원의 출영 안내로 동일 오후 11시경 전회 입동 시 수용되었던 「아지트」에서 북괴 공작지도원 이모와 접선하여 사상교양을 받은 후 동월 11일경 귀환하였고
6. 동일 14시경 상피의자 박성옥 가를 방문, 동인과 접선 회합하고 동백림 방문상황 중 (가)편지를 이모 공작지도원에게 전한 결과 추후 통지하겠다고 대답하더라 (나)교양내용 중에 평화통일방안은 당의 기본방침이며 성취 불가능할 시는 해방전선으로 전향한다고 하더라 (다)여비는 사재 약 150마르크를 소비하였다는 등의 보고를 하였으며
7. 1967년 6월 22일 오후 3시경 상피의자 박성옥의 처 김복순(33세)이 안내한 동독간첩 독일인 성명미상(35세 가량)을 자가에서 접선하고 동 간첩으로부터 (가)신변이 위험하니 독일인을 따라 입동하라 (나)여권이 없으면 「체코」·「유고」로 탈출하라는 내용의 북괴대사관 공작지도원 김YH의 서신지령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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