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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생겼다 … 한진중 노사 5년 만에 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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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1일 오후 선박 수주 소식을 접한 한진중공업 직원들이 영도조선소 2도크 작업장에서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10일 5년 만에 벌크선 3척을 수주했다. [송봉근 기자]

‘저희 노조는 과거 강성 노동운동으로 국가와 사회에 걱정만 안겨준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새로 조직된 노조입니다. 회사 측과 협력해 해당 선박을 노사 분규 없이 최고의 품질로 제작하여 귀사에 적기 납품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난 2월 14일 현대상선, STX팬오션, SK해운, 한진해운 등 4개 해운회사에 날아든 김상욱(50)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명의의 탄원서다. 이 해운회사들은 한전이 석탄을 운반할 15만t급 벌크선 9척을 발주하기 위해 장기용선계약을 맺은 곳들이다. 김 위원장은 해운회사들이 한전의 화력발전소에 사용할 석탄을 실어 나를 벌크선 발주 절차를 진행하자 해운회사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미리 탄원서를 보낸 것이다. 탄원서 내용은 대의원 대회 등 조합원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확정했다.

 이후 현대상선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방문해 노사의 입장을 듣고 입찰 절차를 진행했다. 노조의 협력 의지 등을 확인한 현대상선은 10일 한진중공업을 벌크선(3척) 건조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벌크선 한 척당 500억원짜리니 한진중의 총 수주금액은 1500억여원이다. 한진중공업이 2008년 이후 5년 만에 수주한 상선이다. 12일 현대상선과 LOI(건조의향서)를 체결하고 6월께 본 계약을 맺으면 건조에 들어간다.

김상욱 노조위원장이 선박 수주를 위해 해운회사에 보낸 동의서를 보이고 있다. 노사 분규 없이 적기 납품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송봉근 기자]

 배를 수주하기 위한 노사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에 인수위를 비롯해 정치권과 정부 관련 부처를 직접 찾아가 “배를 수주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탄원서도 보냈다.

 사측도 전 세계 영업망을 총동원해 수주 활동을 펼쳤다. 발주사와 해운사를 직접 찾아가 ‘노사가 화합해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선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선형을 개량하고 입찰 가격을 원가 수준으로 낮췄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배를 수주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파업이나 점거농성으로 무산돼 대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퍼졌다”며 “하지만 새 노조의 조합원들은 회사의 정상화를 원하고 있어 수주 활동의 첫 결실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한진중 노조가 각서나 다름없는 탄원서를 해운사에 보내는 상황은 새 노조 출범 이전인 1년4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새 노조의 한 간부 조합원은 “민주노총 산하 강성 노조여서 회사의 경영 사정 등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요구 조건만 고집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크레인 농성, 희망버스, 시신농성 등으로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사실상 노사의 대화는 단절된 상태였다.

 수주 소식이 들려온 11일 회사 내 특수선 도크에서는 ‘쾅’ ‘쾅’하는 망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장작업을 하던 정순학(53)씨는 “직원 모두 고무돼 있다. 일감이 없어 휴업 중인 다른 동료들도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가볍다”고 말했다. 도크 옆 야적장에는 직원 250여 명이 철판 절단과 용접 작업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휴업자들도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1년간 출근을 못하고 있는 정종열(43·배관파트)씨는 “회사로 돌아가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할 생각이다. 앞으로 노사가 양보하면서 상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집에서 가사노동 중이다. 한진중은 지난해 4월부터 일감이 없자 순환휴업을 해왔다.

 협력업체와 주변 상인들도 반기고 있다. 이종포(43) 건우선박도장㈜ 사장은 “조선업 특성상 한 번 물량이 확보되면 연쇄 수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때 50여 개(2500여 명)였던 협력업체들은 지금은 10여 개(300여 명)로 줄었다. 회사 안에 있던 도장업체 15곳 가운데 9곳이 도산하거나 이전했다.

 폐업 상태였던 회사 주변 식당가도 들떠 있다. 음식점 주인 황영희(53·여)씨는 “노사가 손을 잡으니 지역 상권에도 햇살이 찾아들 조짐”이라며 기대했다.

부산=김상진·위성욱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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