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2.0, 선순환의 기부 문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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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의 많은 IT 기업들이 주식을 공개함에 따라 높은 기술력을 가진 젊은 백만장자들이 새로운 세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문과 TV는 그들을 ‘사이버 구두쇠’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음에도 왜 사회에 환원하고 기부하지 않는지를 힐난했다. 그러나 그 같은 비판 중 일부는 불공평한 것이다. 우선 그들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은 현금이 아닌 회계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자선활동은 은퇴한 후에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부를 이루기는 했지만 20대, 30대, 또는 40대일 뿐이었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MBA 과정에 있던 로라 아릴라가 안드레센(Laura Arrillaga-Andreessen)은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실리콘밸리의 젊은 백만장자들에게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효율적으로 기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통적인 자선활동에서 벗어나 스마트한 자선활동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이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자선활동에 비즈니스적인 관점과 방법을 도입해 실리콘밸리의 똑똑한 기업가들에게 영리적 투자와 같은 수준의 매력을 느낄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의 기부(기부 1.0)가 기부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불러일으켜 기부 액수를 끌어올리는 단계라면, ‘기부 2.0’은 기부의 지출을 투명하게 하고, 이것이 다시 더 많은 기부를 가져오는 한 차원 높은 선순환의 기부문화를 뜻한다.

#그래서 그는 '기부 2.0'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을 넘어, 어떻게 물고기를 잡는지 가르치는 것도 넘어서서, 완전히 새롭고 더 나은 방법 즉 낚시 산업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구체적인 실천 사례의 하나가 절대적인 물 부족 지역인 인도 라자스탄 주(州)에서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프로젝트 혜택을 입은 지타(Geeta)이다. 그녀는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 해수 담수화 공장에서 싼값에 물을 제공받아 급수대를 통해 물을 판매하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한다. 이 개발 모델은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수입원을 제공하여 일회적인 원조나 자선이 아닌 지속가능한 생계수단을 만듦으로써 지타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변화는 그냥 돈을 주는 것만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과 자원을 제공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세계 곳곳에서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일반 기업체라면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품 또는 서비스를 복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조치를 취할 것이지만, 글로벌 문제에 대처하고자 하는 자선사업에서는 오히려 복제 가능한 좋은 아이디어가 가난과 질병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하겠다.

#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비영리단체인 킥스타트(KickStart)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농부들에게 무작정 원조를 하는 대신 저렴한 물 펌프를 개발하여 판매하는데, 그들이 자선 기부의 일환으로 펌프를 무료로 배포하지 않고 판매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가난한 농민들이 펌프를 구입하는 데에는 자신들의 투자와 헌신이 요구되기에 80% 이상의 농민들이 구입한 장비를 소득 창출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이것은 30% 미만의 사람들이 기증된 펌프를 같은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연구결과와 비교되는 수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일방적인 원조와 자선보다는 삶을 개선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 엄청난 힘과 동기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봉사하는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저 지원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결정을 내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결정에 함께 참여함에 따라 직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족 한 마디. 옮긴이는 책의 제목 ‘Giving 2.0’을 ‘기부 2.0’으로 번역하면서 우리 말 ‘기부(寄附)’와 영어 ‘기브(give)’가 의미뿐 아니라 발음까지 비슷하다는 점을 찾아내고 “남에게 뭔가를 줄 때 느끼는 마음처럼 그 말도 세계 공통!”이라면서 새삼 감탄한다.

◇ 로라 아릴라가 안드레센(Laura Arrillaga-Andreessen)=기부와 자선활동, 그와 관련한 교육이 직업인 사람으로 미국의 내로라하는 큰 부자 자선가들이 모두 그녀의 컨설팅을 받았다. 2012년에는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과 미국의 자선왕 12명에 부부가 함께 선정되어 <포브스> 30주년 기념호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남편 마크 안드레센은 네스케이프의 공동창업자로, 위키피디아에도 나오는 유명한 IT 사업가이자 자선가이다. 1998년 벤처업계의 기부 코칭 전문기관인 ‘실리콘밸리 벤처 펀드(SV2)’를 설립해 기부활동을 시작한 이래 ‘마크 앤 로라 안드레센 재단’의 대표이자 ‘아릴라가 재단’의 이사를 맡고 있으며, 스탠퍼드대 교수로서 비즈니스 전략과 자선활동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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