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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 영어 배우기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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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근대적 삶의 대표적 상징 가운데 하나가 영어 배우기입니다. 박노자-허동현 두 교수가 쓰는 한국 근대사 1백년 풍경에 대한 본격적 스케치를 영어 이야기부터 시작해 봅니다.

한국인에게 영어가 갖는 의미를 개화기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윤치호를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윤치호의 영어 실력은 오늘날 웬만한 미국 지식인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박교수는 비판적 입장에서, 허교수는 실용적 입장에서 영어와 미국을 조명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아이의 혀 수술까지 해가며 '영어 배우기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 아이가 미국 사회에서 '우리'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1백20년 전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운 최초의 조선인 윤치호(尹致昊.1865~1945)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883년 1월부터 4월까지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에게서 영어를 배운 뒤, 그해 5월부터 서울에서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의 통역으로 발탁된 10대 후반의 윤치호. 네이티브 스피커도 아닌 네덜란드 사람에게 고작 4개월 동안 영어를 배운 뒤, 임금 앞에서 중차대한 국사(國事)의 통역을 성공적으로 해낸 그는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조선 최초의 도미(渡美) 사절로 1883년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신임장을 윤치호가 영문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비준'(批准:ratification)이란 단어처럼 당시 조선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보입니다. 한자로 써놓아도 무슨 뜻인지 잘 몰랐을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는 영어로 파악했던 것이지요.

그의 천재성은 1888년 11월 4일부터 시작된 미국 유학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1년쯤 되던 1889년 12월 7일부터 거의 완벽한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윤치호의 일기에는 현재의 미국 지식인들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준 높은 어휘들이 보입니다.

예컨대 그는 미국에서 만난 한 일본계 의사에 대해 "dissimulation을 지혜로 잘못 알고 있다"('윤치호 일기'1890년 2월 27일자)라고 평하고 있는데, 'dissimulation'이 '본인의 나쁜 점을 숨기는 위선'을 뜻한다는 것을 아는 미국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변변한 영한사전도 없이 난삽한 인문서적을 탐독하여 'dissimulation'과 같은 라틴 계통의 고급 어휘를 습득한 윤치호의 실력과 투혼이 실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일기마저 영어로 쓸 만큼 미국을 완전하게 내면화해 진짜 미국인이 되려고 했던 희대의 천재 윤치호는 과연 미국의 상류 사회에서 '우리의 구성원'으로 대접받았을까요? 그의 일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들에게 가끔 얻어맞기도 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새웠는가 하면,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 늘 은근히 -가끔은 매우 노골적으로- '왕따'당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이 소위 자유의 땅에서 천부 인권을 누리려면 일단 먼저 백인으로 태어나야 한다"('윤치호일기'1890년 2월 14일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됐을 그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보면 '황인종의 맹주''백인 침략과의 투쟁의 총사령부'임을 자칭했던 일제의 간사한 계략에 넘어가 친일로 돌아선 그의 행동을, 용서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1백년 전 미국인이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다 비참하게 무너진 한 조선 천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배울 것과 취할 것이 있지만, 미국이 우리의 '자상한 어버이'가 되리라는 순진한 상상, 미국이 약자를 동등하게 대해주리라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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