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인쇄된 쌀·비료 부대 깨진 유리창에 붙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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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농민시장에 등장한 남한의 대북 지원용 쌀 부대. '대한민국'이라고 쓰여 있다.[데일리NK 제공]

"최근 일반 주민 사회에서 '남조선'을 한국이라 부르는 주민이 늘고 있다. 한국이라 부르지 않도록 각별히 교육해라."

북한 당국이 최근 주민들의 사상교양을 위해 만든 '강연 자료'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그만큼 북한 주민 사회에서 '한국' 또는 '대한민국'이란 말이 친근해지고, 널리 불리기 때문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이런 풍조에 단단히 한몫한 것이 우리가 북한에 보낸 쌀 부대와 비료 부대"라며 "북한은 한마디로 한국산 부대의 홍수"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북쪽으로 넘어간 쌀과 비료 부대의 숫자만 따져 봐도 엄청나다. 지난해까지 북쪽에 지원된 쌀은 모두 165만t. 40kg짜리 부대 4000만 개 이상이 북한으로 갔다. 총 155만t이 지원된 비료의 경우 20kg짜리 부대가 7000여만 개다.

북한 주민은 이 부대를 다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개성 등 북한 지역을 다녀온 통일부 관계자들은 '대한민국' '대한적십자사', 비료제조회사인 '여수시 남해화학 주식회사'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힌 부대를 가지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주민을 수없이 목격했다고 한다.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협동농장 또는 개인들의 곡물 저장용이다. 강풍에 떨어져 나간 유리창 자리에는 비료 부대를 붙여 차가운 바람을 막는다. 구멍난 지붕 위에 쌀 부대를 붙여 비를 피한다. 때로는 장독대의 뚜껑으로, 겨울철엔 북한 어린이들의 눈썰매 대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북한의 농민 시장인 '장마당'에서 한국산 부대에 곡물을 담아 파는 것은 일상적인 광경이 됐다.

각종 자재가 부족한 북한 주민에게 한국산 부대가 어느덧 생활 필수품이 된 것이다. 질긴 화학소재(폴리프로필렌)로 만들어져 쉽게 터지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사정이 이렇자 북한 당국은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지원되는 옥수수도 중국산이 아닌 한국산 부대에 넣어달라" "부대가 찢어질 수 있으니 여분의 빈 부대를 많이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통일부는 2003년까지 전체 쌀 부대 수의 2%였던 여분 부대 비율을 2004년부터 3%로 높였다.

쌀과 비료 지원 초기 북한 당국은 "부대에서 '한국'이란 글자를 빼달라" "아무 글자도 없는 백지(白紙) 부대에 쌀을 넣어달라"고 요구했었다. 내부 단속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대북 지원에 대한 여론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선 불가피하다"며 거부했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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