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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 옹의 장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전후 서독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인망이 높았던 서독 전 수상 「아데나워」 옹이 19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장서 했다. 이 비보를 접한 세계지도자들은 다같이 그의 서거를 숙연히 애도하며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있다.
한때 그의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찬양과 비난의 양론이 엇갈린 때도 있었다. 완강한 고집노인,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라는 비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역사적인 업적은 명실공히 불후불멸의 것으로 날이 갈수록 빛나고야 말 것이다. 1949년에서 1963년까지 14년 동안 서독 수상으로 집권하고 있을 때, 그는 고희를 훨씬 넘은 노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경륜과 지략과 원대한 세계관을 지닌 명재상으로서 서독 재건에 눈부시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그의 조국 독일에 대한 충성된 애국자였을 뿐만 아니라 전후 치열한 동서냉전시대에 걸쳐 세계 정치의 방향을 주름잡은 거성이었다.
고 「처칠」 경은 「아데나워」 옹을 가리켜 「비스마르크」이래 가장 뛰어난 독일의 지도자라고 격찬하였다지만, 그는 패전 독일의 황량한 잿더미로부터 독일 부흥의 기적을 낳게 하였다. 또 독일 국민의 복지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유럽」의 어느 민주국가 또는 사회주의국가보다도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였다. 여기에 그의 재능·지력·판단력·용기가 유달리 뛰어났음이 여실히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대외적으로 소련의 파상적인 큰 위협에 대결해서 「유럽」의 단결과 안전, 그리고 번영을 위해 강력한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유럽」공동시장, 「나토」의 가입은 물론 불란서와의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유럽」에서 그야말로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가 더욱 훌륭했던 것은 그의 말기에 있어서 정치적인 거취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후 서독 재건의 공로자였고 「유럽」정치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사였음에 틀림이 없었으나, 그는 물러나야 할 때 깨끗이 물러났다. 그의 정치적 위신이 퇴색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총선거에서 기민당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후 1963년 마침내 은퇴하였다. 그가 권좌에 미련을 가지고 그의 거취를 주저하였던들, 그가 생애에 쌓아 올린 업적을 그만큼 감소시켰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현명한 거취는 그 후 「에르하르트」시대를 거쳐 지금의 대 연방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독의 안정과 번영을 계속 누리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그가 서거할 때까지 서독에서의 「부도옹」의 정치가로서 숭앙되고 마지막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서독은 「아데나워」 옹의 서거와 때를 같이해서 바야흐로 새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아데나워」 옹이 남긴 업적과 유지는 계승되어야 할 것이며 특히 그의 염원이자 독일국민의 염원인 독일의 통일이 이룩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독일과의 우의와 「아데나워」 재임시대의 한국에 대한 협조를 상기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업적을 추모하고 그의 명복을 기구 하는 동시에, 정부로서도 그 장례와 애도에 응분의 조의표시가 있을 것을 요망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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