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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서 203만대 리콜 … 현대·기아차 ‘미국식 견제’ 받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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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지난 2008년 도요타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잘나갔다. 세계 시장 판매 1위 자리에 등극한 데 이어 미국 시장에서도 GM 등과 1위를 다투던 시절이었다. 그해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많이 팔린 차량 20개 중 5개가 도요타의 차량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미국에서 발생한 한 건의 차량사고는 도요타를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도요타의 고급 브랜드인 렉서스ES350을 몰고 가던 경찰관 마크 세일러의 가족 네 명이 석연치 않은 급가속 사고로 사망했다. 조사 결과 도요타의 바닥매트가 미끄러지면서 가속페달을 눌러 급가속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결론 났다. 설상가상으로 세일러의 처남이 사망 직전 공포에 떨면서 911에 건 전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전 미국이 도요타에 대한 공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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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례를 찾기 힘든 초대형 도요타 리콜(Recall) 사태의 발단이었다. 리콜은 어떤 상품에 결함이 있을 때 생산 기업에서 그 상품을 회수해 교환 또는 수리해주는 제도다. 모든 제품에 다 해당되지만 특히 자동차 업계와 친숙한 용어다. 업체가 문제 차량의 모든 구매자를 찾아내 수리해주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소비자만 선별적으로 수리해주는 무상수리와는 다르다. 물론 업체가 입는 타격도 훨씬 크다. 도요타 사태는 2011년까지 전 세계에서 1000만 대 이상의 차량이 리콜된 이후에야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태의 여파로 도요타는 17%를 넘어서던 미국 시장 점유율이 12%대까지 추락했다가 최근 들어서야 엔저 현상 덕택에 판매량을 회복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현대·기아차의 200만 대(국내외 총합) 리콜 사태를 보면서 도요타의 전례를 떠올리는 이유다. 현대·기아차는 도요타가 주춤하는 사이 미국 시장 점유율 10%를 돌파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엔저 현상과 ‘연비 파동’ 등이 겹치면서 성장세가 주춤거렸다. 점유율도 7%대까지 떨어졌다가 지난달에야 간신히 8%대로 올라섰다. 대규모 리콜 사태가 반가울 리 없다. 리콜 대상 차량들에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현대·기아차 주력 차종이 거의 망라돼 있다. 엑센트(2007∼2009년 생산품), 투싼(2007∼2009), 엘란트라(한국명 아반떼HD·2007∼2010), 싼타페(2007∼2011), 베라크루즈(2008∼2009), 제네시스 쿠페(2010∼2011), 쏘나타(2011), 쏘렌토(2007∼2011), 옵티마(K5·2011), 론도(카렌스·2007∼2010), 스포티지(2007∼2010), 세도나(그랜드카니발·2007), 쏘울(2010∼2011) 등이 그 면면이다. 최신 베스트셀러 모델인 2011∼2013년형 엘란트라(아반떼MD)도 포함된다.

 리콜은 왜 이뤄진 걸까.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지적한 현대·기아차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브레이크 스위치의 결함으로 브레이크 점멸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부위의 고장이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도 크루즈컨트롤(항속 주행) 기능이 해제되지 않는 후속 고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이와 별개로 2011~2013년에 만들어진 아반떼MD(미국명 엘란트라)는 커튼 에어백이 부풀어오르는 과정 중 지붕 쪽 지지대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운전자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리콜 조치됐다.

 사태 확산 여부는 전적으로 대형 사고 발생 여부에 달려 있다. 마크 세일러 가족 참사와 같은 상징적인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면 미국 내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5월 미국의 한 엘란트라 운전자는 “자동차 충돌 시 에어백이 터지면서 차량 윗부분의 부품이 튀어나와 귀가 절반 정도 잘려나갔다”고 주장했다. 이 사례는 지금까지 현대·기아차 리콜 원인과 관련된 유일한 사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현대차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이번 리콜에 미국 자동차 업계의 ‘현대차 때리기’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실제 도요타 사태 때도 도요타를 견제하려는 미국 자동차 업계의 음모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시장 분위기는 도요타 사태 때처럼 험악하지는 않다. 익명을 요구한 자동차 부품업계 관계자는 “언뜻 봐서는 제동장치 쪽 케이블에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며 “케이블 이상으로 판명된다면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기아차가 조심스레 내놓은 공식 입장도 “에어백이나 브레이크의 기능적 문제가 아니라 부수적인 부분들의 결함”이라는 것이다. 한 현대차 관계자도 “에어백이 터지는 과정에서 귀를 잘렸다는 피해자의 얘기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며 “실제로는 차내 거울 쪽에 부착된 지지대 일부가 떨어져 귀를 스친 정도”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이 대부분 리콜 대상 차량이나 대리점 연락처 안내 등 사실관계 보도에 그치고 있다는 점도 일단은 반가운 대목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미국 자동차 시장에선 그간 현대·기아차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의 대형 리콜 사태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1970년대 이후 300만 대 이상의 대형 리콜만 모두 12건이다. 이 중 9건의 주인공이 미국 국내 브랜드인 GM과 포드였다. 도요타 이전의 최대 규모는 1996년 포드의 790만 대 리콜이었다.

박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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