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오너들의 등기이사 사퇴 … 책임경영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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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이에 앞서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도 등기이사에서 물러났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역시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을 사퇴했다. 대기업 오너들의 등기이사 사퇴가 봇물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문경영인 체제의 확산과 책임경영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하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들 그룹은 오너가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가거나 검찰·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아 홍역을 치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센 경제민주화 바람과 함께 등기이사로서 져야 할 법적 책임에 작지 않은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게 옳을 듯싶다.

 그동안 정부는 대기업 오너에게 등기이사를 맡도록 독려해 왔다.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행사하면서도 등기이사조차 맡지 않는 것은 책임경영에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자기 대기업 오너들이 앞다투어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것은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실형 선고에서 보듯, 경영권 행사와 배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등기이사들의 법적 부담이 훨씬 커졌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오너들의 자택부터 압수수색하는 경우도 흔해졌다.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되면 등기이사들의 부담은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은 오너 경영을 지렛대 삼아 성장을 거듭해 왔다. 경제 위기가 닥치면 오히려 투자를 확대하는 역발상 경영이나, 단기적 성과 대신 멀리 내다보면서 신성장산업을 개척한 것은 오너들의 과감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런 장점들이 경제민주화와 대기업 때리기로 유실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최악의 구도는 오너가 사실상 경영을 계속 맡으면서 법적 책임만 전문경영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막고 대기업 정책의 순기능을 끌어내려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 정책기조를 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책임경영이 뿌리내리고, 한국 특유의 ‘오너 경영’의 장점도 되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