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 “나 자신이 바로 회사지요”

중앙일보

입력

중고 자동차 유통회사 오토 튜브에 근무하는 김진일(28)씨는 사귀기 시작한 뒤 첫 생일을 맞는 여자친구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깜짝 이벤트를 구상하던 그의 눈에 어느날 지하철 광고문구가 들어왔다.

‘인터넷에서 만드는 나만의 책’. 김씨는 여자친구의 생일 두달 전부터 여자친구에게 바치는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60쪽 정도 쌓이자 그는 광고에서 본 맞춤책 전문 사이트에 들어가 디자인과 서체 등을 선택했다. 가상 완성본을 검토하고 ‘출판’ 버튼을 클릭하자 이틀 뒤 ‘내 사랑 뚱띠’라는 제목의 책 한권이 배달됐다. 김씨의 생애 첫 저서였다. 상상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든 그의 여자친구는 책을 한자한자 짚어 읽으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서은숙(32)씨는 16세 때부터 틈틈이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서씨는 “출판이 대단한 것으로만 여겨져 엄두를 못 냈었는데 소량 출판이 가능해져 이처럼 책을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출판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한마디로 부피 줄이기 작전이다. 소비자의 주문에 따라 소량 출판이 증가하고 있다. 맞춤책 전문 사이트 ‘아이올리브’(www.iolive.co.kr)는 연애편지·육아일기 등 개인이 남기고 싶은 기록을 책으로 묶어 내준다.

소비자가 책에 넣을 내용을 모은 뒤 아이올리브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디자인 등을 클릭하면 최소 책 한부도 만들 수 있다. 물론 정식으로 출판되는 책과는 조금 다르다. 편집·교열이 생략되고 비교적 단순한 마스터 인쇄기법을 사용해 5분이면 책이 완성된다. 얇은 시집 두께의 책 한권을 만드는 데 약 1만원이 든다.

아이올리브의 이승휘 홍보과장은 “하루 주문량이 4백∼5백권”이라며 “일반인들에게도 책을 만들 수 있게 하고 출판사의 골칫거리인 재고를 없애기 위해 소량 주문 출판한다”고 설명했다.

책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면서 소량 출판해주는 곳도 있다. 도서출판 ‘삶과 꿈’은 의뢰인이 써온 원고를 검토하고 판매까지 대행해준다.
보통 출판사에서는 최소 출판 분량을 권당 1천부로 잡는데 이 곳은 5백부까지 가능하다.

‘삶과 꿈’의 심재경(34) 기획부장은 “지난해보다 주문량이 20% 증가했다”며 “앞으로 책의 기본을 갖추면서도 제작 단가를 낮춰 50부 이하로도 출판이 가능케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권 제작에 약 두달이 소요되며 비용은 평균 5백만∼7백만원이다.

출판량만 소량화되는 것이 아니다. 출판사도 몸집을 줄이고 있다. 출판사 대표가 직원이자 총책임자로서 기획부터 최종 검토까지 아우르는 1인 출판사가 대형 출판사의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백원근 출판연구소 과장은 “1인 출판사가 증가하는 추세”라며 2000년에는 1인 출판사가 전체 출판사의 약 6%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십일월출판사의 이용식(46)대표는 자신이 곧 회사다.

오전 9시쯤 15평 크기의 사무실로 출근해 거래처에 주문량과 판매부수를 확인한다. 그런 다음 오후 내내 외근을 한다. 각 서점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을 소개하고 잡지·서적들을 훑어보며 기획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저자와 책 디자이너를 만나고 인쇄소에 들르는 것도 그의 일이다. 과거 대형서점에서 영업을 한 경험이 있는 이대표는 그 경력을 살려 마케팅에 역점을 두고 있다. 편집·디자인·교열·인쇄는 외부에 수주를 주지만 최종 검토는 자신이 맡는다.

지난해 말까지 1년 동안 출판사를 혼자 운영한 눌와출판사의 김효형 대표는 힘이 부쳐 올 초 직원을 한명 뒀다. 도서 기획 및 편집 경험이 있는 그는 기획·편집·교열·영업을 직접 담당하고 그 외의 작업을 외부에 맡긴다.

김대표는 “출판 과정이 분업화돼 있기 때문에 전문 분야를 외부에 맡기면 소수 인력으로도 출판사를 충분히 꾸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규모는 작지만 1인 출판사가 도서시장에 미치는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십일월출판사가 펴낸 ‘1분 테크닉’은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4판까지 나왔다. 이용식 대표가 과감하게 사무실을 비우고 몇개월간 일본 출장을 감행한 성과다.

눌와출판사도 지난해 9월 출판한 ‘궁궐의 우리나무’가 6주 연속 교보문고 교양과학분야 베스트셀러 1,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지금까지 의뢰인을 기다리기만 하던 보수적인 출판업계가 이제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출판업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봐도 될 것 같다.

김혜수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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