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 운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드라이브」를 좋아하기로는 월남 여인들이 제일인걸요.』 「트럭」운전사로 넉달 동안 일하다 돌아온 오성식(32·서울 성북구 정릉동)씨는 『운전사의 인끼가 으뜸이었다.』면서 『일과가 끝난 뒤에 슬쩍 빠져 나와 월남 여인을 태우고「사이공」거리를 질주하던 생각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요즘엔 그럭저럭 월수가 2만원은 되지만 10만원 이상 받던 그때 생각에 신통한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오씨는 『몸무게가 3「킬로」나 늘었었는데 요즘 다시 줄어들었죠. 그곳에선 차주의 눈치나 교통 순경의 감시를 받지 않았으니까요.』 빙그레 웃었다.
『운전사 가운데도 중기 운전자가 제일이지요. 워낙 이상스럽게 큰 것을 다루니까 기술도 굉장하고 힘도 센 줄 알고 존경까지 받았으니까요.』 「불도저」운전사로 갔다가 신병으로 6개월만에 돌아온 장건상(45·서울 성북구 삼양동)씨는 『외국 기술자의 입국에 상당한 신경을 기울이던 월남 노조측도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면서 즉각 반론을 폈다.
『어떻든지 운전사는 파월 기술자의 핵심일 뿐 아니라 다루는 차량에 관계없이 평균 월봉이 5백55「달러」(15만원)로 가장 높죠.』 두 사람은 큰소리로 자랑했다.
월남에 있는 1만7백여명의 우리 기술자 가운데 운전자 수는 2천여명으로 단연 타 부문을앞도하고 있다.
장씨는 동네에서 「월남집」으로 불려지는 언덕받이의 20평짜리 양옥을 가리키며 『무허가 판자집이 여섯 달만에 이렇게 둔갑했죠.』하면서 밝게 웃었다.
『숙식비가 1백80「달러」인 「캠퍼」생활은 누구 못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더벌려고 1백「달러」짜리 하숙 생활을 해왔다.』면서 『매달 4백「달러」씩 송금 할 수 있었다』는 장씨에 대해 오씨는 『한달만 더 머물렀어도 새나라 차 한 대를 살 수 있었는데 공사가 끝났다하여 해고 되는 바람에….』아쉬운 듯 꼬리를 흐렸다.
『새로 길이 뚫리고 빈터에 건물이 설 때 마다 대한 남아로서의 자부심이 높아졌다.』는 이들은 『월남땅 어디를 가나 우리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흐뭇한표정.
운전사의 파월, 특히 중기 운전사의 파월은 한국에 남은 운전사들의 지위도 크게 향상시켰다는 당국자의 말이다. 『일부 특수 운전면허를 가진 운전사들은 구하기가 어려워졌을 뿐아니라 임금도 작년의 2배 이상으로 껑충 뛰었다.』는 것이며 한창 건설사업에 바쁜 서울시건설행정 당국자는『중장비 운전사는 반 이상이 월남에 간 모양』이라했다.
서울시의 등록된 중기 운전사는「불도저」와 「트렉터」가 20명, 「트레일러」1백명, 「롤러」10명 등 모두 1백58명. 이것은 「불도저」 1백65명, 「트랙터」 55명, 「트레일러」 63명 등 9백93명의 우리 중기 운전사가 가 있는 월남에 비해 6분의 1도 안되 는 실정이어서 「3만원 이하의 월봉으론 일 할 수 없다.』고 베짱을 튀긴다고….
파월 운전사 어윤혁(31·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씨의 동생 윤실(28)씨는 『매달 3백50 「달러」씩 보내오는 돈을 모두 예금한다.』면서 『셋방을 벗어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즐거운 표정.<이경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